
히과 님 (@glqlrhkxk) - [ 초여름 바다 손님 ]
안녕하세요, 저는 아야세라고 합니다. 이 글을 보고 계신다는 건 제가 더 이상 살아있지 않다는 뜻이겠죠. 죽을 때까지, 죽어서까지 다른 이에게 피해만 끼쳐서 죄송합니다.
제가 가지고 온 것 중 휴대기기, 귀중품이나 금전이 될만한 것들을 가지고 가셔도 좋습니다. 아마도 제가 죽었다는 걸 깨닫기까지 이 방은 다른 사람이 대여하지 못했을 테고, 그로 인한 피해가 있을 테니까요.
사실, 유언에는 가족을 향한 미안함을 표한다고 하는데 그들과는 이미 다 이야기를 끝내고 왔습니다. 제 생을 걸쳐 도움을 준 모든 사람들께는 감사와 미안함을 모두 표하고 왔으니,
이 편지에선 저의 생에 마지막에 도움을 주실 여관의 주인분께 감사드리고 싶어요. 물론 이것이 당신의 생업이긴 하지만, 저 따위에게 선뜻 방과 식사를 제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제 생에서 마지막이 될 밤은 따뜻했습니다. 더 많은 말을 하기엔 염치가 없다고 생각되어, 이만 줄이겠습니다. 여관이 더 번창하길 바랍니다.
초여름의 어느 날 밤, 마요이는 작은 좌식 책상에 앉아있었다. 곱게 접은 종이를 봉투안에 넣고, 내용물이 보이지 않게 입구를 잘 접었다. 어디에 놓아야할까 둘러보다 그냥 제가 앉아있던 책상 중앙에 올려뒀다.
등을 끄기 직전까지 봉투엔 뭐라고 써야할까 고민하던 마요이는 아무것도 쓰지 않은 채 간접등을 껐다. 유언이라기엔 남기는 말이 없었으며, 편지라기엔 간직할만한 내용이 아니었다. 그냥 읽고 태우길 바랐다.
덜 닫힌 창문 새로 파도 소리가 들렸다. 아슬하게 몸을 일으킨 마요이가 침대로 쓰러졌다. 팔로 몸을 끌어 침대로 기어 올라가 벌렁 드러누워, 아직은 쌀쌀한 밤임에도 이불 없이 잠을 청했다.
흐릿한 알람 소리에 일어난 마요이는 주위를 둘러 핸드폰의 위치를 짐작하려했지만 당최 방향이 잡히질 않아 별수 없이 침대에서 일어나야했다. 시간이 지난 탓에 알람이 끊기자 핸드폰의 행방이 묘연해져
마요이는 핸드폰을 찾는 것을 관뒀다. 아마 오 분 후면 다시 울릴 것이다. 그러고도 두 번 더 울릴 테지만 샤워 소리에 묻힐 거라 생각한 마요이는 옷가지를 벗어던지고 화장실의 목욕 의자에 주저앉았다.
준비를 끝낸 후, 벌써 일어나서 마당을 쓸고 있는 여관 주인에게 잠깐 다녀오겠다면서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 조식 시간에 맞춰 오라는 배웅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방 안에서 들리는 파도 소리는 결코 작지 않았는데, 걸어서 가자니 시간이 꽤 걸렸다. 어느새 새벽에서 이른 아침이 되어, 항구엔 배도 적었다. 발끝에 힘을 주고 끄트머리에 선 마요이는 탁한 바닷속을 구경했다.
부서지는 파도가 아닌, 일렁이는 물결은 마요이의 눈앞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고는 다리에 힘을 풀었다. 구경하느라 앞으로 치우친 몸이 맥없이 아래로 추락했다.
눈을 감은 채 물에 휩쓸리던 마요이가 불현듯 눈을 뜨자, 저 멀리 인영이 보였다. 그 사람은 살기 위한 발버둥조차 없었다. 아래를 등진 채로, 몸을 웅크린 형태로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다.
죽었나? 세 글자가 머릿속을 스치자마자 마요이는 팔다리를 허우적거려 앞으로 나아갔다. 마요이에게 물 속은 바깥보다 자유로웠다. 사람에게 성큼 다가선 그는 몸을 낚아채 수면으로 올라갔다.
저항도 힘도 없는 몸은 물에서 꺼내기 쉬웠고, 해변으로 밀려나온 마요이는 늘어진 몸을 붙잡고 울었다.
"죽지 마세요, 죽지 마세요, 죽지 마세요..."
자신도 죽으려 바다에 뛰어들었으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너무 이상했다. 모순은 자괴감이 되어 자신을 찔렀고 그 아픔에 마요이는 울었다.
엉엉 울면서 죽지 말라고 말하던 마요이는 이내 흔들어도 반응이 없는 몸을 좀 더 바다 밖으로 끌어내 심폐소생술을 시작했다. 흉부 압박을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콜록거리며 일어난 남자는 엎어져 물을 뱉어냈다.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남자는 눈이 뻑뻑한지 얼굴을 몇번 쓸어내리다 반 정도 뜬 눈으로 절뚝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저기...!"
마요이는 떠나려는 남자를 붙잡으려 짧은의 목소리를 냈다. 남자는 멈칫, 걸음을 멈춰 느릿하게 뒤돌았다. 몸을 감싼 흰 셔츠와 베이지색 바지가 젖어 서로 달라 붙은 채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시선을 좀 더 들어 눈을 마주하자 남자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마요이는 그의 맨발과 표정을 보고서 그도 자신과 같은 생각으로 바다를 찾은 것임을 눈치챘다. 급하게 따라가려 몸을 일으킨 마요이는 균형을 잡지 못하고 고꾸라졌다.
얼굴까지 모래 범벅이 된 채로, 마요이는 몸을 일으켜 그 남자를 뒤쫓았다. 남자의 걸음도, 마요이의 걸음도 느렸다. 남자는 묘하게 한쪽 다리를 절었고, 마요이는 아직 어지러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상태로 편의점까지 들어간 두 사람은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아침부터 세찬 에어컨이 켜진 편의점 안에서 젖은 옷을 입은 채로 있던 탓에 마요이는 금새 재채기를 했다. 두 사람 사이의 정적이 깨진 순간이었다.
"그, 저..."
"왜 자꾸 따라오시나요?"
"그게... 저랑 같이 가실래요...?"
"네?"
"넘겨 짚은 거긴 하지만... 전화도 지갑도 없으신 것 같고, 그러면 정말 아무것도 없이 온 것 같다는 생각에... 제, 제가 머무는 여관이 있으니까요... 저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으으, 이렇게 말하는 편이 더 수상하겠죠..."
정리되지 않아 횡설수설 하는 말을 남자는 조용히 들어준 남자는 점원에게 꾸벅 인사하고는 편의점을 나갔다. 마요이는 덩달아 인사하며 뒤쫓아나갔다.
남자는 아침 볕을 맞으며 한참동안 고민하는 듯 싶더니 마요이에게 안내를 부탁했다. 남자의 말에 화색이 돈 마요이는 웃으며 말했다.
"여기서 멀지 않으니까요, 금방 갈 수 있을 거예요."
느린 걸음의 두 사람이 물에 젖은 채로 걸으니 지나온 길엔 모두 흔적이 남았다. 여전히 뚝뚝 떨어지는 물을 두 사람 중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은 채, 마요이는 여관으로 돌아왔다. 멀리서 여관 주인이 뛰쳐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래도 자신이 남기고 간 편지를 이미 본 모양이라, 마요이는 조금 머쓱해졌다.
아침에 봤던 가벼운 옷차림 그대로 자신을 찾으러 마을을 뛰어다닌 것 같았다. 주인은 마요이를 끌어안고 신께 감사했다.
"오오, 네가 써 두고 간 말이 현실이 된 줄 알고 정말 놀랐단다. 아아, 다시 돌아와서 다행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오, 옷이 다 젖은 상태니까요...! 더 젖기 전에 놓아주세요. 이젠 정말 어디 안 가요."
"약속하려무나, 옆엔 누구니?"
"오늘 새벽에 바다... 수영을 하다 만났어요. 제가 머물던 곳에서 같이 지내도 될까요?"
"그럼, 된단다! 둘 다 묵는 동안 편하게 있다 가렴."
"처음 뵙겠습니다. 카제하야 타츠미라고 합니다."
예를 차려 꾸벅 인사한 타츠미를 향해 여관 주인은 물을 데워줄 테니 얼른 방으로 올라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열쇠는 아침에 마요이가 카운터에 두고 갔었다며 챙겨주는 것까지 잊지 않은 채.
원래 자신이 지내던 방으로 데려올 생각이었으나, 갑작스럽게 둘만 남게되자 마요이는 당장 이 문을 박차고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당장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한 사람을 혼자 둘 수는 없었다.
자신의 사회성이 0에 수렴한다는 사실이 이렇게 통탄스러울 수 없었다. 자신이 어떤 말을 해도 상대가 기분 나빠할 것 같아, 마요이는 아주아주 조심스럽게 말을 골라 건넸다.
"저, 아까 여관 주인께 인사할 때 이름은 왜 말씀하셨나요...?"
"... 네? 가족이 아니었나요?"
"아뇨...? 어제 처음 만난 사이인데요."
타츠미의 얼굴이 기묘하게 구겨졌다. 자신이 큰 오해를 한 것이라. 눈치가 빠른 마요이는 타츠미의 실수를 깨닫고 입을 다물었으나, 웃음은 눈치가 없어 자꾸 입술을 비집고 나오려했다.
"흐흐흐흐, 죄송해요... 웃으면 안 되는데... 으흐흐."
결국 웃음이 터진 마요이에 타츠미도 힘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너무 각별한 사이처럼 굴길래 가족인 줄 알았습니다. 어제 처음 만난 사이일 거라곤 생각도 못 했어요."
"어제 낮에 이 여관에 들어왔는데, 하필 어제 손님이 저 밖에 없다더라고요. 둘이서 한참 떠들고 식사도 대접받았어요."
"여행을 오셨나 봐요, 이른 아침에 바다 수영하는 걸 즐기시나요?"
"아뇨, 저도 여기 죽으러 왔어요."
정적.
"... 그러시군요."
마요이는 자신의 입을 때리고 싶었다. 하지만 제 앞엔 숨막히도록 어색한 사람이 있기에 때리는 대신 입술을 말아 물고 제 뾰족한 이빨로 응징했다.
"... 하지만 덕분에 타츠미 씨를 만났으니까요. 게다가 살았으니... 여행을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일단 씻을까요, 저희 둘 다 바닷물에 젖은 상태니까요."
흐려진 대화를 정리한 타츠미가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했다. 먼저 씻으라는 말을 남긴 채 마요이는 방을 나서 주인에게 수건을 몇 장 부탁했다.
두 사람이 차례로 샤워를 끝내고, 옷은 주인이 빨아주겠다며 또 가지고 갔다. 괜찮다며 사양했지만 어차피 손님도 없는데 소일거리나 하자며 빼앗듯 가져간 덕에 두 사람은 또 한 방에서 침묵을 맞이했다.
"제 이름은 아시는데, 저는 당신의 이름을 모르네요."
억지로 창 밖으로 시선을 던져 어색함을 무마하려던 마요이에게 이번엔 타츠미가 먼저 말을 걸었다. 마요이는 그 말에 머뭇거리다 자신의 성을 이야기했다.
"아야세라고 불러주시면 돼요."
"아야세... 씨인가요. 아야세 씨는 왜 오늘을 고르셨나요."
"한여름엔 해수욕장이 열리니까요...?"
"생각보다 단순한 이유네요. 그래서 초여름을 고르셨나요?"
"겨울에 죽으려다, 봄까지 고민했어요. 더는 미루기 싫어서 모두에게 인사하고 이곳으로 왔어요. 전 바다를 좋아하거든요."
"그렇게 좋아하는 것이 있는데, 왜 죽으려고 하셨나요."
"왠지 취조하는 분위기네요... 걸음걸이를 보면 아시겠지만, 전 균형을 잘 못 잡아요. 귀에 이상이 생겨서 균형감각에도 이상이 생겼거든요. 일상 생활은 별로 무리 없지만 전 다이버라서요. 방향을 잃으면 안 돼요."
"아... 그래서 절 건져낼 수 있었군요."
"네, 다이버로 지내려면 기본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들이니까요. 이젠 별로 쓸모 없어요, 수영을 안 한 지도 많이 오래 됐어요."
"저는... 운동선수였습니다. 육상이었어요, 단거리 달리기."
"후후, 이름과 어울리는 직업이네요."
"그런가요? 저도 한 때는 이름조차 어울린다고, 신의 축복만을 받은 존재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 오만함에 제게 시련을 주셨을 테죠.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차가 전복되었는데, 다리가 끼여 완전히 으스러졌었습니다."
"수 차례의 수술과 오랜 재활 끝에 일상엔 아무런 문제가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만, 안타깝게도 전 육상 선수였습니다. 제 미래가 완전히 암전된 탓에... 신을 더 믿지도, 그렇다고 원망하지도 못한 채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우울엔 끝이 없더군요. 결국 이런 선택을 해 바다까지 찾아왔습니다. 우울과 바다는 닮았으니, 그 바닥에 다다르면 저도 뭔가 깨달을까 싶어서요."
"둘의 끝엔 닿지 못했어도 아야세 씨 덕에, 오늘 하루를 더 살 수 있게 됐습니다. 신께서 주신 인연인 당신에게 감사합니다."
천천히 자신을 말하는 타츠미의 얼굴이 조금씩 밝아졌다. 그의 감사인사로 말이 끝맺어졌을 때, 타츠미의 얼굴은 옅은 미소마저 띄우고 있었다.
"아, 아니에요... 저야말로 타츠미 씨가 하루 더 살아주신다면 기쁠 거예요."
마요이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몰아치는 고백과 감사에 정신이 혼미했다. 침대에 드러누운 마요이 옆으로 타츠미가 따라 누웠다.
"오늘은 일정이 있나요? 가능하다면 이 주변을 좀 둘러보고 싶은데."
"전 여기 주민이 아닌데요... 안내라면 이곳의 주인 분이 더 잘해 주실 거예요."
"아야세 씨와 함께 걷고 싶어서요."
"히익, 갑자기요?"
"안 되나요? 하지만 방 안에만 있어도 좋으니까요."
"방금까지 바다 아래로 가라앉으려던 사람치곤 긍정적이네요..."
"아야세 씨가 구해주셨으니, 이것은 삶을 이어가라는 뜻이겠지요. 처음부터 시작해 보려합니다. 달리기 전에 분명 걸음마부터 뗐을 테니까요."
"분명 그랬을 테죠... 저도 물 속에서 눈을 뜨는 것부터 시작했을 거예요."
"신께서 당신을 보내신 건 함께 극복하라는 뜻이겠지요."
"... 그렇게까지요..."
이른 시각에 눈을 떴고, 수영을 했으며, 따끈한 물로 샤워까지 끝낸 마요이는 침대에 누워 있으니 잠이 쏟아졌다. 웅얼웅얼 답하는 마요이를 가만히 쳐다보던 타츠미는 마요이의 몸을 침대에 곧게 눕혔다.
"헉...!"
번쩍 눈을 뜬 마요이가 창밖을 보자 여전히 들리는 파도 소리와, 노을이 보였다. 그리 적게 잔 것도 아니었을 텐데 점심도 건너뛴 채 까마득한 시간을 잤다.
"아야세 씨? 괜찮으신가요?"
짧게 숨을 들이키는 소리를 들었는지 침대 아래에서 부스스하게 몸을 일으킨 타츠미가 마요이를 살폈다.
"괜찮아요... 갑작스럽게 깬 바람에 놀랐나 봐요."
"아까 주인께서 아야세 씨가 일어나면 같이 내려오라고 했어요. 꽤 시간이 지나긴 했지만 지금이라도 같이 내려가실래요?"
"아, 네. 아무래도 저녁 시간이니까요. 제가 자느라 방 청소도 못 하셨겠네요... 식사 후에 제가 하든지 해야겠어요."
"주무시는 사이 청소는 다 끝냈어요. 후후, 청소기를 돌려도 모르시던 걸요."
"아... 폐만 잔뜩 끼쳤네요,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여관 주인께서는 이게 생업이실 테고, 저는 자처한 일이니까요."
"더 늦기 전에 내려가야겠네요, 분명 오래 기다리셨을 테니까..."
마요이는 침대에 앉아 머리를 땋아내리며 말했다. 타츠미는 불을 켜고 마요이의 옆에 서서 가만히 기다렸다.
"금방 일어날 테니 그렇게 무언으로 압박하는 짓은 그만둬 주실래요..."
"아, 그게 아니라 생각보다 머리칼이 길다는 생각에... 신기해서 너무 빤히 쳐다봤나 보네요. 불편하게 해서 죄송해요."
"아녜요, 사과할 일은 아닌 걸요. 이제 내려가요."
어느새 머리 정리를 다 마친 마요이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앞장섰다. 아래층의 다다미 방에 들어서자, 식사 준비를 마친 식탁과 여관의 주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오니? 머리를 보니 아주 푹 잤나 보구나."
"덕분에요. 제가 자느라 청소도 불편하게 하셨을 텐데, 죄송해요. 원래는 저녁도 나가서 먹고 와야 하는데."
"뭐 어떠니, 네가 돌아가기 전까진 손님도 안 받을 예정이니 마음 놓고 쉬렴."
"네에?! 그런 말을 해 놓고 마음 놓고 쉬라니요오..."
"후후, 아야세 씨가 많이 놀랐나 보네요. 하지만 원래 여긴 소수만 받는다고 하시던 걸요. 그렇죠, 키노 씨."
"그럼요, 그럼요~ 카제하야 군."
장난스럽게 말을 주고 받는 걸 들은 마요이는 기겁했다.
"제가 자는 사이에 두 분이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자, 자. 더 식기 전에 얼른 앉아서 저녁 먹자. 아야세 군은 점심도 건너뛰지 않았니."
"네에... 그럼 잘 먹겠습,"
마요이가 무릎 꿇고 앉아 식전 인사를 하고 젓가락을 들려던 찰나, 두 사람이 손을 모아 쥐고는 일제히 기도를 읊었다.
"...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심에 예수의 이름으로 감사드립니다. 아멘."
"일본엔 기독교가 드물다 들었는데, 제 옆엔 둘이나 있네요..."
"후후, 이것 또한 신의 뜻이랍니다."
"히익?! 전 신을 믿는다든지 하는 성스러운 거랑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데요??"
"이제 들자꾸나, 아야세 군도 카제하야 군도 많이 먹으렴."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두 사람이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우며 이야기 나누고 있을 때, 마요이는 조용히 밥알을 씹었다. 번지는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묘하게 불편하기만 했다. 두 사람은 이따금 마요이에게도 신이 내려주신 당신께 감사한다는 말을 하며,
줄곧 신에 관한 이야기만 해댔다.
"잘 먹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먹었음에도 마요이보다 빠르게 식사를 끝낸 타츠미는 여전히 키노 씨와 수다를 떨었다.
"어릴 때 성가대에 들어가진 않았지만, 좀 더 커서 반주 연주는 가끔 맡았습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성가대에 들어가서 크리스마스면 하루 종일 찬송가를 불렀단다."
"후후, 무척 잘 어울리세요. 제가 감히 이런 말을 해도 될진 모르겠지만, 말씀에서 신실함이 느껴집니다."
"그러니? 모태신앙이라는 말을 하면 다들 신기해 하더라구."
"이 나라에서 기독교는 드무니까요."
깨작깨작 밥을 삼키고 있는 마요이에게 갑작스레 질문이 돌아왔다.
"아야세 씨는 분명 종교가 없어 보였지요. 이참에 신을 믿음은 어떠십니까?"
"아니요, 아니요? 저는 분명 구원이라든지, 기도라든지 과분한 일인 걸요!"
"신은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신은 모두를 사랑하신단다."
두 사람이 동시에 마요이에게 말했다.
딸꾹.
깜짝 놀라 밥을 헛삼킨 마요이가 콜록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식사를 다 끝낸 이후에 마저 말할까요?"
아니요... 마요이는 목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다. 튄 밥풀을 정리하고, 끝나지 않길 바랐던 식사도 어느새 끝이 나 식탁을 정리하고 있었다. 아까의 말과는 달리 불편해하던 마요이를 눈치 챈 두 사람은 마요이가 소외되지 않도록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돌렸다.
"앞으로 며칠간 이곳에 머무를 예정인데, 주변에 마땅히 갈 곳이 있나요?"
"아야세 군과 함께 다닐 예정이지? 사실 이곳으로 관광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바다가 목적이라 바다를 빼곤 크게 둘러볼 게 없는데..."
"아야세 씨와 가볍게 산책할 수 있는 길도 좋습니다."
"그런 거라면 주변에 풍경이 좋은 곳이..."
"전 산책을 나간다고 한 적도, 그 전에 같이 다니겠다고 한 적도 없는데요..."
"하지만 네가 카제하야 군을 데려오지 않았니"
"아야세 씨도 아시다시피 전 돈도 휴대전화도 없어서요, 신세 좀 지겠습니다."
뻔뻔한 두 사람의 대답에 마요이는 마른 세수를 하곤 자세를 고쳐 앉았다.
"길이 어떻게 된다구요...?"
다음 날, 마요이는 꼼짝없이 두 사람이 세운 계획에 따라야 했다. 키노 씨는 아무리 손님이 없어도 여관을 관리해야 한다며 남았고, 마요이와 타츠미만이 키노 씨가 빌려 준 차에 탔다.
"벌써 운전 면허도 있으시네요. 부지런하게 사셨나 봐요."
"이리저리 움직여야 하는데, 자꾸만 부모님의 손을 빌리는게 죄송스러워, 나이가 차자마자 땄습니다. 이렇게 다시 운전대를 잡을 날이 올 줄은 몰랐군요."
"그래도 키노 씨 덕분에 이동은 편하게 할 수 있겠어요, 다행이네요."
"그러네요. 아야세 씨, 벨트는 잘 매셨나요?"
"네, 이제 출발하나요?"
"네, 출발하겠습니다."
"아야세 씨? 도착했습니다. 많이 피곤하셨나 보네요, 잠깐 새에 잠드시다니."
"네? 벌써요? 분명 네비게이션엔 40분 거리라고..."
"후후, 차가 적었던 탓에 금방 올 수 있었습니다."
"시, 신호는 지켰던 거죠...?"
묘하게 벌써부터 힘이 빠진 마요이는 타츠미의 도움으로 차에서 내릴 수 있었다. 추천받았던 산책로는 시기가 애매해 생각보다 초라했다. 타츠미도 마요이도 머쓱함과 실망을 감추지 못한 채, 짧은 산책을 끝내곤 차로 돌아왔다.
"아무래도 이 시기엔 꽃도 풀도 없으니까요."
"아쉽긴 하네요... 키노 씨도 분명 좋아할 거라고 하셨는데."
"그래도 길이 험하진 않아 다행이었습니다, 다니기에 불편하진 않으셨죠?"
"네, 괜찮았어요. 정말 말 그대로 산책을 위한 길이네요."
이른 아침부터 식사까지 준비해 준 키노 씨 덕분에 아침을 먹고 나왔음에도, 산책마저 운동이라고 타츠미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타츠미가 머쓱한 듯 웃었다.
"... 식사하러 갈까요?"
"점심을 먹기엔 조금 이르지 않을까요?"
"방금 그 소리 듣고도 무시할 수 있을 리 없거든요."
"하하... 신경쓰이게 해서 죄송합니다."
"허기지는 건 매 한가지니까요. 혹시 가리는 음식은 있으세요?"
"아, 아뇨. 없습니다."
"그럼 아까 지나오면서 봤던 가게로 가요."
작은 동네로 나온 두 사람은 느긋하게 걸으며 가게로 향했다. 지나가며 봤던 풀 중에 어떤 것이 곧 꽃 필 예정이고, 어떤 시기에 오면 더 예쁠 것 같은지.
키노 씨가 아무래도 신난 바람에 시기는 별로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며 웃었다.
"아무래도 손님이 오는 건 성수기인 한여름이니까요."
"그 즈음에 저곳에 다시 가면 녹음이 잔뜩 우거져있겠네요."
"초여름에 두 명의 손님을 받아 신나신 것 같았습니다."
걷다 보니 어느새 도착한 가게에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섰다. 음식을 주문하고, 식사가 나오자 숟가락을 들고 먹으려던 마요이가 멈칫했다.
"왜 그러시나요, 아야세 씨. 어디 불편하신가요?"
"아... 아뇨. 식사하고 나면 다른 곳으로 이동할 예정이죠?"
"네, 그곳도 거리가 조금 있어서, 똑같이 차를 타고 이동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렇군요. 네..."
마요이는 어쩐지 입맛이 사라져 몇 번 깨작거리다 종국엔 물만 홀짝거렸다. 그걸 알아챈 타츠미가 마요이에게 정말 어디가 안 좋은 거 아니냐 걱정스런 눈빛으로 물었지만, 마요이는 괜찮다며 고개를 도리저었다.
"그럼 가는 길에 간식이라도 사서 가는 걸로 하죠. 저, 죄송한데 혹시 여기 주변에 가게가 있나요?"
옆에서 이야길 엿듣고 있는 게 뻔한 사장에게 타츠미는 넉살 좋게 지리를 물었다. 친절하게 메모지에 길까지 써 준 사장은 두 사람에게 잘 가라며 배웅했다.
"친절하신 분이네요. 다음 번에 올 기회가 생긴다면 또 오고 싶어요."
"네... 저도요."
하루의 여행 끝에, 두 사람은 여관으로 돌아왔다. 일찍이 움직인 덕분에 노을이 질 때 돌아올 수 있었고, 차에서 내리자 키노 씨가 타츠미를 반겼다.
"잘 다녀왔니? 나름대로 내가 고른 명소들인데 어땠는지 듣고 싶구나."
"다니는 내내 바다와 떨어지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해안도로를 그렇게 오래 달려본 것도 처음이네요."
"아야세 군은... 곯아떨어졌구나. 피곤했나 보네."
"차 멀미라도 하시는지 차만 타면 주무시더라고요."
"에구, 고생했겠네. 그런 걸 미리 말해줬다면 약이라도 줬을 텐데."
"저도 그러려 했는데, 처음에 간 곳을 빼곤 주변에 마땅히 가게가 없어서... 차라리 자는 게 편하실 것 같아 그냥 뒀습니다."
"그래도 이제 깨워야 하지 않겠니. 저녁은 준비해 뒀단다. 필요하면 목욕물을 데워줄까?"
"아, 아뇨. 저녁 먼저 먹겠습니다. 금방 들어갈게요."
"그래, 나는 준비를 마저 끝내러 가야겠구나."
키노 씨가 잰걸음으로 여관 안으로 사라지자, 타츠미가 마요이를 흔들어 깨웠다.
"아야세 씨, 여관에 도착했어요. 이만 일어나세요."
"아... 음, 네? 벌써요?"
"후후, 오늘 하루 종일 그 소리네요. 아무래도 푹 주무셨나 봅니다."
"그, 그런 걸까요..."
두 사람은 여관으로 돌아가 키노 씨와 함께 식사를 하고, 오래도록 수다를 떨었다. 내일은 어딜 갈 거냐는 키노 씨의 물음에 마요이가 차는 절대 안 탈 거라고 말해 타츠미가 충격 받는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오늘 여행이 별로였냐는 말에 절대 그렇진 않았지만 내일도 차를 탄다면 남은 날은 방 안에 죽은듯이 보내야할지도 모른다며 변론했다. 타츠미는 아쉬운 기색이었지만 그럼 내일은 주변만 살펴보거나 교통카드를 사야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제 쉴 수 있다는 생각에, 마요이는 마음 놓고 식사를 끝낼 수 있었다.
"이제 오세요? 키노 씨랑 할 이야기가 많았나 봐요."
샤워를 끝낸 마요이가 머리를 닦아내고 있던 차에 타츠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 내일 일정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내일은 날씨가 안 좋을 것 같다고, 비 소식이 있으니 여관에 머무는 걸 추천드리더군요. 여기서도 할 수 있는 건 많으니 걱정 말라 하셨습니다."
"그 책은..."
마요이는 타츠미의 손에 들린 가죽덮개가 덮힌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성경입니다. 오랜만에 좀 읽으려고요."
"간접등을 켜도 책을 읽기엔 어두울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네, 괜찮습니다. 지금 당장 읽으려고 가져온 것은 아니니까요. 내일 여유로울 때 읽을 생각으로 갖고 왔습니다."
책을 내려놓고 자신도 씻겠다며 화장실로 들어가는 타츠미를 뒤로 하고, 마요이는 드라이기를 들어 머리를 말렸다. 마요이가 머리를 정리하는 사이 샤워를 끝낸 타츠미가 좌식 의자에 앉아 성경을 읽었다.
머리를 다 말리고, 땋아내려 정리를 끝낸 마요이가 전등 버튼에 손을 얹고 물었다.
"꺼도 괜찮은가요?"
타츠미는 가름끈을 끼우고 책을 덮었다.
"네, 꺼도 괜찮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아야세 씨도요."
둘째 날은 여관 주인의 말처럼 비가 왔다.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부슬부슬 내리는 모양새가 정말 봄이 가고 있음을 알렸다.
세 사람은 어디서 났는지 모를 보드게임을 하며 오전을 보냈다. 마요이는 돈을 내고 있다지만 너무 많은 신세를 지고 있다며, 점심 식사 만드는 걸 도왔다.
하지만 점심을 먹을 때 기다란 보라색 머리칼이 나오는 바람에 점심을 먹고 난 후 키노 씨에게 일명 '잔머리가 삐져나오지 않고 머리 땋는 법'을 배웠다. 기름을 발라 땋은 듯 단정하게 정리된 제 머리를 보자 마요이는
어색함에 거울을 피해다녔다. 그 머리도 잘 어울린다는 타츠미의 칭찬에 반응할 정신도 없었다. 키노 씨는 마요이의 머리를 다 땋아주고도 남의 머리칼을 만지는 게 반갑다며 타츠미의 머리도 군데군데 땋아내렸다.
양쪽으로 더듬이처럼 땋은 머리가 생긴 타츠미는 뻔뻔하게 어때요, 잘생겼나요? 따위의 말을 해 키노 씨가 자지러지게 웃었다. 그 사이에서 마요이도 함께 웃으며, 간지러운 감정을 느꼈다.
느리게 지는 노을을 볼 때까지, 세 사람은 실없지만 알차게 놀았다. 키노 씨가 냉장고가 비어 장을 보려는데 같이 가겠냐는 말에 두 사람은 따라나섰다. 식료품이 가득한 장바구니에, 마요이는 슬쩍 간식이 딸린 장난감을 담았다.
"오늘은 생각보다 정말 알차게 보냈네요. 아야세 씨도 그렇게 생각하죠?"
혼자 꼼지락거리며 장난감을 갖고 놀던 마요이가 퍼뜩 대답했다.
"네? 아, 네. 여기서 놀거리가 그렇게 많을 줄은 몰랐어요. 그냥 나른한 하루를 생각했는데 어쩐지 어제보다 더 바빴던 것 같네요."
"잘 준비는 다 되셨나요? 이제 불을 끄려는데."
"네, 다 됐어요. 안녕히 주무세요, 타츠미 씨."
"아야세 씨도 안녕히 주무세요."
잔잔한 파도 소리가 창새로 들어왔다. 옆을 슬쩍 내려보니 타츠미도 모로 누워 색색거리는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며 잠에 빠져있었다. 무의미하게 누워 천장만을 바라보던 마요이가 손을 꼼지락거렸다.
달그락거리던 장난감도 머리맡에 가만히 누워있었다.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킨 마요이는 잠시간의 어지러움에 침대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오늘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그의 계획은 너무 많이 밀렸고, 두 사람은 자신이 살길 원했다. 두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은 행복했지만, 마요이는 살고 싶지 않았다. 성을 가르쳐준 이유도 그것이다. 곧 죽을 사람의 이름은 알아서 좋을 것이 없었다.
우당탕.
어지러움이 그쳤다고 착각한 마요이는 몸을 일으켜 몰래 나가려다, 순간 세상이 핑 돌아 쓰러졌다. 큰 소리를 내며 바닥과 맞부딪힌 탓에 곤히 자던 타츠미를 깨웠다.
"아야세 씨?"
"아... 타츠미 씨... 그, 목이 말라 잠시 일어나려다 그만 떨어졌어요. 괜찮으시다면 좀 도와주시겠어요?"
마요이는 이런 자신마저 무력해서 끔찍했다. 도움이 없으면 살지 못한다. 폐를 끼쳐야만 살 수 있는 존재는 없는 편이 좋았다.
"절 깨우셔도 됐는데. 잠시만요, 불만 켜고 도와드릴게요."
급하게 불을 켠 타츠미가 마요이에게 돌아왔다. 아야세 씨, 코피가 나요. 하는 말을 덧붙이며.
코를 틀어막은 채 가까스로 침대에 앉은 마요이가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있었다.
"피는 더 안 나나요? 그렇게 숙이고 있지 않아도 돼요."
"죄송해요, 잘 주무시고 계셨는데 잠을 방해했네요."
"그럴 리가요, 오히려 제가 미안한 걸요. 자리끼라도 가져다 놓고 잤어야 했는데."
"타츠미 씨가 죄송하실 필요 없어요... 제가 멋대로 굴다 이렇게 된 거니까..."
"아야세 씨가 스스로 한 행동이 절 구하셨잖아요. 아야세 씨는 스스로가 한 행동에 좀 더 긍정적인 시각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만 끼치는 걸요, 혼자서 물 한 잔 마실 수 없어 새벽에 사람을 깨우다니."
"아야세 씨."
고개를 푹 숙인 마요이에게 타츠미가 몸을 숙여 눈을 맞췄다.
"얼굴 좀 볼게요, 멎었나 확인만 하게요."
조심스럽게 얼굴을 들어올린 타츠미가 휴지를 빼고도 피가 흐르지 않는지 확인했다.
"아야세 씨, 세상에 도움받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어요. 아야세 씨도 제 생명의 은인이시잖아요. 그런데도 제게 베풀어주고 계시고, 키노 씨도 숙박만 제공하시는 게 일이지만 식사도 여행도 도와주고 계시고요."
"당신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있기에, 도움 받아도 괜찮아요. 혹시나 도움만을 받고 있다 생각해도 그게 폐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면 되는 일이니까요."
코피가 묻은 휴지를 한 번더 감싸 휴지통에 버린 타츠미가 누울수 있겠냐고 물었다. 아직 눕기 싫으면 자신과 더 이야기 하자고, 타츠미는 선뜻 자신의 새벽을 마요이와 함께했다.
오래도록 다독이며, 자신과 마요이를 위로했다.
셋째날도 여전히 비가 왔다. 이번엔 어디서 났는지 모를 젠가로 아침을 시작했다. 이걸 넘어뜨리는 사람이 아침 설거지를 담당한다는 내기까지 걸었다. 세 사람이서 먹은 그릇이야 십 분이면 끝날 설거지일 텐데,
세 사람은 아주 진지했다. 키노 씨의 차례가 왔다. 슬금슬금 조심스럽게 빠지는 젠가를 보며 마요이는 마음을 졸였다. 키노 씨의 다음 차례는 자신이었다. 끄트머리만을 남기고 모든 나무도막이 밖으로 나왔다.
꺼내기만 한다면 키노 씨는 이제 이 아슬아슬한 젠가 게임에서 완전히 열외가 될 터였다. 달그락, 와르르. 빠져나오던 젠가가 위쪽을 건드려 그만 무너지고 말았다.
"오늘은 설거지를 안 하나했더니~"
"점심까지 몰아주는 걸로 한 판 더 하는 건 어떤가요?"
"좀 구미가 당기는구나. 하지만 그런 유혹에 넘어갈 수야 없지, 저리 물렀거라~!"
타츠미의 말을 들은 키노 씨는 악마의 유혹이라도 들은 것처럼 팔로 십자가를 만들어 위협 아닌 위협을 했다. 젠가 정리는 둘이서 해 주길 부탁한다며 몸을 일으킨 키노 씨는 부엌으로 향했다.
둘이 남은 거실에 티브이의 기상 정보가 울려퍼졌다.
"새벽부터 비가 쏟아졌는데요, 오늘 낮이 되며 하늘이 갤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번 비가 지나가며 한동안 맑은 날씨가 이어지고..."
"오늘 비가 그치나 보네요."
"그러네요, 오래도록 올 것같았는데."
"이 비가 지나가면 여름이 오겠네요."
"많이 더워지겠어요. 여름의 더위는 날이 갈 수록 심해지던데..."
"오후에 하늘이 개면 같이 바다에 갈까요?"
"네?"
"초여름의 바다는 오늘이 마지막일 것 같아서요."
"자, 점심 설거지 내기로 한 판 더 하자!"
"벌써 끝내셨나요?"
"내 솜씨를 뭘로 보고, 저 정도 설거지는 설거지도 아니지!"
두 번째 판에선 타츠미가 당첨됐다. 셋이서 점심은 뭘 먹을지 고민하고, 요리를 함께 하고, 식사도 마쳤다. 마요이는 이번 식전 기도를 따라했다. 감사함과, 이번엔 자신의 머리칼이 안 나오길 바라며.
어느새 밖은 맑게 개어 햇볕이 부서지는 한낮이 되었고, 식사가 끝난 후 타츠미는 부엌에 갇혀 설거지를 해야 했다.
"요리에 쓴 설거지도 같이 하는 거였나요?"
"물론이지, 나도 그랬단다."
"지면 안 됐네요. 점심 먹은 식기만 하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으로 있었어요."
"얼른 끝내고 오렴~ 안 그럼 간식을 내가 다 먹어버릴 거야~"
거실에 앉아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마요이는 탁자에 놓인 과자를 하나 집었다. 까슬까슬한 쌀과자를 입으로 가져가려다 도로 내려놓고 손을 털었다. 설거지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꽤 기쁜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다리를 쭉 뻗고 앉은 키노 씨가 신난 듯 몸을 흔들거렸다. 티브이를 보며 쉬고 있는 키노 씨를 보며 입술을 달싹이던 마요이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키노 씨."
"응?"
"타츠미 씨가 설거지를 끝내면 함께 바다에 다녀와도 될까요?"
"바다에?"
"네, 해변에 다녀오려고요. 날도 개었으니까요."
"하긴, 날씨가 오락가락 하니 잠깐 개었을 때라도 다녀와야지. 다만 슬리퍼는 안 된다."
"아, 안 그런다니까요."
"믿음은 이미 깨졌어~ 앞으로 네가 와도 혼자 바다에 간다 그러면 따라갈 거다."
"무슨 이야기 중이신가요?"
어느새 설거지를 끝낸 타츠미가 두 사람의 곁으로 왔다.
"타츠미 씨와 함께 바다에 다녀오겠다고 했어요. 가도 괜찮지만 슬리퍼는 절대 신지 말래요."
"슬리퍼요?"
"아야세 군이 아침에 잠깐 나갔다 온다면서 신고 나갔던 게 슬리퍼란다. 그래서 그날 여관 안의 실외용 슬리퍼를 모조리 치웠어."
"다른 신발도 있으니 그걸 신고 다녀올게요, 정말이에요. 타츠미 씨도 함께 가는 걸요."
"더 늦으면 다시 비가 올지도 모르니까요. 얼른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올게요, 키노 씨."
"그래, 저녁 시간이 되기 전엔 오려무나."
두 사람은 각자 신을 꿰어신고 키노 씨에게 인사했다. 여관은 해변보단 항구에 가까워서, 두 사람은 키노 씨의 음식 솜씨나, 혹은 오늘 점심 메뉴가 어땠는지와 저녁은 무얼 먹을 것 같은지 같은 이야기를 나누며 산책하듯 걸어갔다.
"해변은 생각보다 머네요."
"항구와 가까운 곳이었으니까요, 아무래도..."
한낮의 초여름 날씨는 오랜 산책에 맞지 않았다. 흐르진 않아도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에 타츠미는 신을 벗어내고 파도 가까이에 앉았다.
"아야세 씨도 여기 앉으실래요?
"그러다 옷이 젖으면... 분명 키노 씨가 놀라실 텐데."
"그러시려나요? 그럼..."
타츠미가 바지를 걷고는 몸을 일으켜 바다로 성큼성큼 걸어들어갔다. 화들짝 놀란 마요이가 다급하게 타츠미를 잡으려 움직이다 균형을 잃고 그대로 바다에 빠졌다.
"아야세 씨!"
해변 끝의 파도 속에서 마요이를 건져낸 타츠미가 미안하다며 얼굴의 물을 손으로 훔쳐 걷어냈다. 마요이는 숨을 몰아쉬며 타츠미를 붙잡고 있다 손에 힘을 줘 타츠미를 아래로 끌어내렸다.
갑작스레 실린 체중에 타츠미도 모래에 미끄러져 물 속으로 빠졌다. 금방 물 밖으로 올라온 타츠미가 머리를 넘기고 얼굴의 물을 훔쳐냈다. 두 사람은 파도 속에 서 있었다.
"아야세 씨~"
"왜요, 타츠미 씨가 먼저 그랬잖아요."
"장난친 건 맞지만요, 아야세 씨가 넘어질 줄 몰랐어요."
"됐어요. 혼자 물 속에 다시 들어가든지 하세요. 이번엔 나도 몰라요."
타츠미가 물에서 올라온 걸 확인한 마요이는 머리에서 물을 쭉 짜내고 뒤를 돌아 모래사장으로 나갈 예정이었다. 갑작스럽게 뒤에서 물이 끼얹어져 당황한 마요이가 뒤를 돌자 다시 한 번 물을 뿌렸다.
"죄송해요, 얼굴에 뿌리려던 건 아닌데."
"타츠미 씨이이이...!"
입술을 삐죽이며 잔뜩 삐친 티를 내던 마요이가 타츠미 씨도 이 바닷물 좀 먹으라며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 누가 더 많이 먹이는지 대결하자며 순식간에 경쟁을 붙인 타츠미가 마요이에게 다시 물을 뿌렸다.
기술이 있었던 것도, 그렇다고 서로에게 앙금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두 사람은 서로에게 물 끼얹기를 손발이 쪼글쪼글해지도록 했다. 이전에 바다에서 수영했을 때보다 더 쫄딱 젖은 기분이었다.
지친 두 사람은 모래사장에 앉아 슬금슬금 바다 너머로 숨으려는 해를 구경했다. 어색하지 않은 정적이 두 사람을 감쌌다. 마요이는 발끝을 간질이고 사라지는 파도를 바라보다 파도가 치는 모래 위에 손가락을 갖다댔다.
처음엔 꾹 눌러서 점을 찍었다. 점이 사라지면, 선을 긋고, 선이 사라졌다. 머뭇거리던 손이 글자를 써내려갔다. 쓰는 속도보다 글자가 사라지는 속도가 빨라, 마요이가 쓰는 글은 몇 번이고 파도에 녹아 바다로 갔다.
"뭘 쓰고 계신가요?"
"저의 미래가 될 수도 있었던 것들요."
"예를 들면요?"
"유인 잠수함에 탄다든지."
"그런 소망을 바다에 보내도 되나요?"
"어차피 바다에서 이룰 꿈이었으니... 모두 바다에 묻어주려고요. 저는 못 갈 테지만, 방금 파도에 쓸려간 제 소망은 분명 바다를 헤매다 깊은 곳에 가라 앉을 거예요. 심해에 깃들어 잠들겠죠, 우리가 하려고 했던 것처럼."
"아주 희망이 없나요?"
"타츠미 씨는 지금 사고 전의 기량을 낼 수 있나요?"
"... 아뇨."
"우리가 바랐던 걸 모두 바다의 바닥에 묻고, 우린 우리의 삶을 사는 걸로 해요."
타츠미는 마요이의 말을 가만히 듣다 마요이를 따라 글자를 써내렸다.
"허황된 일을 바라는 건 스스로 좀먹는 일이 되겠죠. 우리의 삶을 새로이 결정하는 것도 좋은 일이겠네요."
"타츠미 씨가 말했던 것처럼... 저흰 걸음마부터, 눈을 뜨는 것부터 시작해 많은 것을 해봤으니까요. 지금부터 시작하더라도 뭐든 할 수 있을 거예요."
마요이는 타츠미가 쓰는 걸 읽어내려다 그만뒀다. 파도가 빠른탓에, 글자를 판별해 뜻을 알기도 전에 파도가 데려가버렸다. 미련조차 남을 수 없도록.
그 대신 마요이는 자신의 이름을 써내렸다. 히라가나로 쓴 이름이 파도와 떠나기 전, 타츠미가 그 찰나를 발견해 물었다.
"마요이...?"
"제 이름이에요. 히라가나는 모두 떠내려갔으니, 이젠 가타카나로만 쓸 수 있겠네요."
실없는 소리였다. 이름을 알려주기 위한 말이었지만, 자신이 해 놓고도 머쓱해서 분위기를 무마하려 웃었다.
타츠미는 그런 마요이의 얼굴을 빤히 보다, 따라서 히라가나로 자신의 이름을 썼다. 글자가 파도와 함께 사라지자 말을 덧붙였다.
"제 이름도 이제 한자로만 쓸 수 있겠어요."
"한자로는 어떻게 쓰나요?"
"그것이..."
타츠미는 몸을 돌려 마른 모래 위에 글씨를 쓰려했으나, 마요이에게 저지당했다. 마요이는 타츠미의 눈앞에 손을 펼치고는 여기다 써 달라 부탁했다.
"모래 위에 쓰면 금방 날아가 덮힐 테니까요."
천천히, 마요이가 알아볼 수 있도록 자신의 이름을 써내렸다. 마요이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주먹을 꼭 쥐었다.
"잘 기억할게요."
태양이 완전히 수평선에 걸렸다. 완전히 마르진 않았지만, 눅눅하게 마른 옷에 두 사람은 슬슬 돌아갈 채비를 했다. 모래를 털고, 신을 찾아 신었다.
앞서 걸어나가 모래사장을 벗어나려는 마요이를 타츠미가 불렀다.
"저희 내년의 바다에서도 만날까요."
마요이는 다른 대답없이 그저 웃어 보였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둘 다 또 바다에 들어갔다 나왔지?"
"옷도 다 말리고 들어왔는데 어떻게 아셨어요...?"
"저녁 시간이 되면 돌아오라고 했는데, 오지도 않고. 몸에도 모래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데 어떻게 못 알아보니."
들어가서 샤워나 해! 저녁은 혼자 먹고 없다! 밥솥을 열면서 하는 말엔 밉지 않은 핀잔이 가득했다. 두 사람은 시간을 줄이기 위해 함께 샤워한 후, 머리에 수건을 하나씩 얹은 채 다다미 방으로 내려갔다.
밥 냄새가 가득해 괜히 더 허기가 지는 기분이었다. 함께 무릎 꿇고 앉아 키노 씨가 오길 기다리자, 자신 몫의 차를 들고 온 키노 씨가 탁 소리나게 내려놓고는 기분이 안 좋은 티를 팍팍냈다.
"내일이면 가겠다고 했지? 함께 마지막 저녁을 보낼 생각에 잔뜩 준비한 음식을 결국 혼자 먹게 됐을 때 얼마나 속상하던지."
"죄송해요... 연락 올 곳이 없으니 핸드폰을 들고다니는 걸 까먹어서."
"됐다! 이미 내 몫은 다 먹고 없어. 너흰 그거나 먹어라."
연이은 핀잔 사이에서 타츠미는 조용히 식전 기도를 했다. 마요이만 쩔쩔매고 있는게 억울해 타츠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러자 놀라 눈을 뜬 타츠미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
"키노 씨, 전에 말씀해 주셨던 걸 잘 생각해 봤습니다. 여기서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어차피 돌아갈 곳도 없고요."
"그러니? 잘 생각했다. 급여도 아쉽지 않게 줄 테니까, 여기서부터 차근차근 시작해도 좋고... 내 자식이란 놈들은 여관엔 관심이 없으니 홀랑 네게 물려줘버릴까 싶다."
"물려요...? 지낸다고요...?"
마요이는 또 자신만 모르는 이야기가 오가자 얼굴에 물음표를 띄우고 두 사람을 쳐다봤다.
"카제하야 군이 자신이 지내던 곳에 모든 걸 정리하고 와서 아무것도 없다잖니. 그래서 괜찮으면 여기서 일하는 건 어떤지 생각해 보라고 했단다."
"처음부터 무언갈 시작하기엔 새로운 장소가 좋으니까요. 여기서 차근차근 해보려 합니다, 청소 같은 건 자신있기도 하고요."
"아... 그랬군요. 맞아요, 저도 내일이면 가는데 타츠미 씨가 어떻게 하실 건지 안 여쭤봤었네요. 지낼 곳이 생겨서 다행이에요."
"내년에 마요이 씨가 오셨을 때 제가 이곳에 있어야 하니까요."
"켁."
이번에도 밥을 헛삼킨 마요이가 콜록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급하게 차를 내어주는 키노 씨와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싱글 웃고 있는 타츠미를 보고 마요이는 내년에도 꼼짝없이 이곳에 오게 될 것임을 직감했다.
두 사람이 바랐던 이상적인 미래는 모두 심해에 깃들었다. 과거에 묶여 욕심을 부렸던 것을 심해에게 안겨주고, 수면 위로 올라와 눈을 뜨는 것부터, 걸음을 내딛는 것부터 시작할 것이다.
"이렇게까지 배웅 안 해주셔도 되는데."
"초여름의 손님은 드물어서 반가울 수 밖에 없단다. 조심히 돌아가렴."
"내년에 봬요, 마요이 씨."
"그런데 마요이는 뭐니? 별명이니?"
"아야세 씨의 이름이 마요이래요, 성은 아야세고 이름이 마요이."
"어머, 그랬니? 이름 보고 뭐냐고 하다니 이것 좀 민망하구나."
"괜찮아요, 제가 말하지 않은 걸요."
여관의 문을 닫고 역까지 따라온 두 사람에게 마요이는 작별 인사를 했다. 하지만 내년에 다시 오겠다며, 그때까지 몸 건강하라는 말 덧붙였다.
"안녕히 계세요."
"안녕히 가세요, 마요이 씨."
"잘 가렴, 아야세 군."
마요이가 탄 기차가 그가 떠나왔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그의 가족과 지인들에게 인사를 나누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아야 했다. 마요이는 이왕이면 가만히 앉아있을 수 있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