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영 님 (@space0w0walk) - [ PARADISE LOST ]
이곳은 낙원이다. 카제하야 타츠미는 그렇게 생각했다.
찬란한 태양이 밝히는 새파란 하늘, 밟을 때마다 사박거리는 고운 모래, 가볍게 머리를 흐트러뜨리는 남풍. 두 발로 선 곳에서부터 시작되어, 무한히 이어지는 투명한 에메랄드빛 물. 누군가의 꿈으로 그려낸 한 폭 수채화 같은 이 해변은 어쩌면 천국의 일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아름다운 풍광이 주는 마음의 여유. 하나 부족함 없이 온유한 생활. 그리고 팔을 뻗으면, 언제든 기꺼이 손을 맞잡아주는 미인.
"...마요이 씨.“
그러므로 낙원이었다.
그 부름에 마요이가 고개를 돌려 타츠미를 마주 보았다. 챙이 넓은 밀짚모자 아래로 깊은 바다를 담은 두 눈동자가 가늘어진다. 평소보다 해변이 한적한 탓일까, 그는 크게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타츠미는 안도하며 마요이의 손을 쥔 채 산책을 이어갔다.
타츠미가 마요이를 만나게 된 건 얼마 전의 일이다.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이름 모를 아름다운 사람이 걱정스러운 낯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타츠미는 자신이 모래사장에 엎어져 바닷물에 절여진 모래범벅인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대뜸 그에게 자기소개부터 하고 말았다. 돌이켜보니 우습기 그지없는 일이다.......
마요이는 자신이 폭풍우 치던 새벽에 바닷가로 떠밀려왔다고 말했다. 타츠미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여기 오게 된 일뿐만 아니라, 오기 전의 일까지도. 남아있는 거라곤 자신의 이름뿐이었다. 객관적으로 보아도 곤란하기 이를 데 없는 상황이었으나, 마요이는 마음마저 천사같기 이를 데가 없어 선뜻 타츠미가 머무를 곳을 내주었다. 필요한 것조차 아낌없이 나누어주는 그에게 반하는 데에는 시간조차 문제 되지 않았다.
여태껏 기억의 회복에 아무런 차도가 없는 것은 내심 이 생활이 만족스럽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아직까지 타츠미의 잃어버린 기억을 자극하는 요소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 눈부신 바닷가는 친숙하게 다가왔지만, 실제로 자신이 있던 곳과는 하등 상관없는 장소인 듯싶었다. 마요이는 타츠미가 폭풍으로 난파를 당한 것 같다고 말했지만 자신이 깨어난 이후로는 화창한 날씨가 이어져 정말 폭풍이 있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마요이,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그야말로 타츠미가 이곳을 떠나 원래의 생활로 돌아가고 싶지 않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어딘가 조금 수상한 미인. 그것이 아야세 마요이의 첫인상이었다. 어스름을 드리운 듯한 긴 머리칼에 바다에서 건친 비취를 연상케 하는 눈동자, 어딘가 곤란한 듯 가련한 표정을 한 사람. 그는 소극적인 성격인 데다 행동거지에 어딘가 떳떳치 못한 듯 눈치를 보는 면이 있어 의심을 사기 쉬운 타입이었으나, 타츠미가 그의 수줍음과 상냥함, 배려심을 알아차리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에게는 내리쬐는 햇빛을 꺼리고, 사람들이 많은 장소는 힘들어하는 등 의외로 이 장소와는 어울리지 않는 면이 있었다. 하지만 해가 질 무렵부터는 마요이도 기운찬 모습을 보여 타츠미는 하루에 두 번씩 산책을 하곤 했다. 아침에는 혼자서, 저녁에는 둘이서.
밤이 찾아오면 둘은 소리 없이 코티지를 벗어나 맨발로 모래사장을 거닐었다. 휘영청 밝은 달과 검푸른 비단 같은 남쪽 하늘을 수놓은 수많은 별들, 그 아래 광활하게 펼쳐진 잔잔한 바다...... 파도가 밀려오는 곳까지 다가가면 물비늘이 끊임없이 반짝이며 잔상을 퍼트렸다. 사람이라곤 단둘, 오직 달만이 지켜보는 때에만 마요이는 부드러운 너울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타츠미는 말없이 마요이를 따라 들어가 그가 물속에서 자맥질하는 것을 지켜보곤 했다. 물은 검었으나 차갑지 않았고, 두 발이 디딜 곳을 잃고 부유하기 시작하면 과연 몸이 마음을 따랐다는 착각에 쉽게 빠지고 말았다.
빛이 없는 물 가운데서도 그는 아름다웠다. 매듭에서 벗어난 머리칼은 하늘거리며 퍼졌고, 중력에 구속되지 않은 몸은 지상에서 볼 수 없는 춤을 그려냈다. 유영을 끝내고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낼 때면 그의 흰 피부 위로 달라붙는 머리칼을 보며 타츠미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인어의 모습을 상상했다. 신화 속의 존재는 꼭 저런 모습을 하고 뱃사람의 앞에 나타났으리라. 저 어두운 물 아래 감춰진 것은 과연 사람의 다리가 맞을까. 그러한 의심의 원인이 사실 마요이게만 있지 않음을 타츠미는 잘 알았다. 자신의 마음을 온통 빼앗겼으니 그에 대한 구실이 필요할 따름이다.......
충동적으로 그의 뺨을 감싸 살며시 끌어당기면, 마요이는 거절하지 않았다. 타츠미는 기쁨과 설렘을 구분할 수 없는 채로 그에게 입 맞추었다. 곧 마요이가 자신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근심도, 시련도 없는 이곳에는 다만 사랑이 있었다.
어느 날 아침은 해무가 짙었다.
타츠미는 아직 아침잠에서 벗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 마요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홀로 해변을 걸었다. 이렇게 짙은 안개가 끼는 날은 드물었다. 어쩌면 처음일지도 몰랐다. 무언가 일어나리라는 묘한 직감에 휩싸인 그 순간, 타츠미는 파도에 밀려온 무언가를 보았다.
둥글게 생긴 그것은 가까이서 보니 검은 모자였다.
"제복의 일부인 걸까요? 군모라기에는 조금 화려하지만....“
타츠미는 챙이 달린 모자를 이리저리 살피며 말했다. 금사와 붉은 띠로 장식된 검은 팔각모는 가운데 커다란 엠블럼이 달려 있었다. 청록색 배경 위로 선명한 알파벳 A. 과연 무엇의 이니셜일까.......
"가끔 크루즈나 배에서 바람 때문에 날아간 물건이 해안으로 밀려오곤 해요... 화, 확실히 제복 같은 느낌이 있네요.“
마요이의 말에 타츠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타츠미는 주워 온 모자를 내려놓았고, 며칠 후엔 마요이가 그 모자를 버리거나 정리했는지 더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기억에서 잊히는 듯 했으나,
정말 그리되지는 않았다.
"...뭔가 비슷한데.“
타츠미는 빨래 사이에서 떨어져나온 검은 장갑을 보며 혼잣말했다. 손등에 마름모꼴로 금사 장식이 되어있는 하프 글러브는 며칠 전 발견한 모자와 그 재질이 유사했다. 어쩌면 이 장갑도 예상했던 제복의 일부분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며 무의식적으로 손에 끼워본 그 장갑은, 놀라울 만큼 타츠미의 손에 정확히 맞았다.
마치 일부러 맞추기라도 한 듯. 어쩌면 자신의 물건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섣부른 의심과 함께, 머리를 쪼개는듯한 두통이 엄습했다. 타츠미는 장갑을 벗지도 못하고 그대로 머리를 부여잡았다. 욱신거리는 감각이 꼭 외상의 고통처럼 느껴졌다. 거칠게 호흡하면서 몸을 수그리자 시야가 아득해지며 명멸하기를 반복했다. 이는 틀림없는 거부 반응이다. 무엇에 대한, 이라고 질문하면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러나 기저에 깔린 두려움만은 분명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타츠미는 이곳에 오기 전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를 부러 반추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에는 또다시 안개가 해변을 찾았다. 타츠미는 자욱한 해무 속을 헤치고 걷는 대신 침대에 앉아 창밖을 구경하는 쪽을 선택했다. 멍하니 뿌연 상공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등을 타고 오르는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평소보다 일찍 깨어난 건 아마 어제부터 상태가 좋지 않았던 자신을 염려한 탓이리라.
마요이는 뒤에서 타츠미를 끌어안고 응석 부리듯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대로 한두 시간쯤 더 있어도 좋건만, 마요이는 이내 스르륵 멀어져 느릿하게 침대를 벗어났다. 간단하게 세수를 마치고 돌아온 마요이는 거울 앞에 서서 머리를 빗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타츠미는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곤 마요이가 솜씨 좋게 머리를 땋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무슨 노래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멜로디는 분명 친숙하게 느껴졌다.
그는 전에도 타츠미를 앞에 두고 몇 번 노래를 불러주었다. 깊은 곳에서 끌어올려 공기를 흔드는 그 음색에 타츠미는 그야말로 넋을 잃을 뻔했다. 사실 자신은 뱃사람인데, 마요이의 노래에 영혼을 사로잡히는 바람에 물속으로 뛰어든 건 아닌가 하는 얼토당토않은 상상을 할 정도로. 마요이의 목소리에는 그런 신비한 힘이 깃들어있다. 혼자서 듣기엔 너무도 아까운지라, 그가 사람들 앞에 나서서 노래하기로 결심한 것을 내심 다행으로 여겼다.
그가 그런 결심을 했었나? 그는 자신에게만... 아니, 이미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노래했던가? 타츠미는 눈을 깜빡였다. 눈 부신 빛이 다시금 명멸했다. 그러나 익숙했다. 아이돌은 스포트라이트에 익숙해져야만 한다. 타츠미는 고개를 돌렸다. 마요이는 언제는 그곳에 있었다. 그가 라이트 아래서 빛무리의 파랑을 향해 손을 뻗으며 노래했다. 바닷가에서 발견한 바로 그 모자를 쓰고서. 설마 그의 것이었던가... 아니, 자신의 것일 수도 있다. 자신은 그와 비슷한 차림새를 하고,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 무대에 올라 미소를 전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므로.
그런데 왜.......
머리가 어지러웠다. 현재와 과거, 진실과 허상이 한 데 뒤섞여 태풍처럼 휘몰아친다. 기억이 요동치며 그 위로 두른 얇은 거짓의 장막을 찢어내고 말았다. 그리고― 진실이 언뜻 그 모습을 비추었다.
"타, 타츠미 씨...!!“
마요이에게 다가가고자 일어섰으나,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대로 휘청거리며 주저앉아 놀란 마요이가 재빨리 다가와 타츠미를 부축했다. 타츠미는 그의 팔을 단단히 잡고 힘겹게 물었다.
"마요이 씨... 우리는 왜, 여기 있나요?"
"......그건,“
마요이가 한참 동안 말을 고르더니 겨우 대답했다. ‘휴가’를 왔으니까요. 그 말을 들으니 타츠미도 '휴가'에 대하여 떠오르는 바가 있었다. 애써 일정을 조정하여 만들어낸 일주일. 둘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꽁꽁 싸맨 뒤 남쪽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그리고 둘은.......
"그게 진실인가요?“
타츠미는 그 의뭉스러운 대답의 허점을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마요이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아, 그는 실로 모든 걸 알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게 전과는 다르다. 안개가 걷히고 그 찬연함을 되찾은 저 바다도, 결코 이전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 아름다운 해안에 고운 모래를 뿌리고, 찰랑대는 물을 채운 뒤 붓으로 세심히 파도를 그려낸 손을. 아야세 마요이가 정성 들여 제작한 한 조각의 세계를.
타츠미는 이 바다가 친숙하게 느껴진 이유를 드디어 깨달았다. 이곳은 틀림없이 마요이가 만든 디오라마의 재구성이다.
"꼭 신과 같은, 이 세계를 창조한 누군가가...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건 아닐까. 그 신이 당신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타츠미는 눈을 질끈 감았다. 괴로운 기억이 뇌리를 스칠 때의 본능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불시착의 충격은 끔찍한 여파를 남겼다. 온몸이 부서질 것만 같았지만, 타츠미는 힘겹게 정신을 다잡았다. 착용하고 있던 산소마스크를 벗어던진 뒤 황급히 옆자리를 돌아보았다. 마찬가지로 산소마스크를 쓰고 있는 마요이는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가슴 한켠이 서늘해진 타츠미는 잴 것 없이 마요이의 어깨를 잡고 흔들며 그를 불렀다. 몇 초 뒤에야 마요이가 간신히 눈을 떴다.
"마요이 씨. 괜찮아요? 정신 차려야 해요. 지금......“
그 순간, 기내에 공포에 질린 외침이 울려 퍼졌다. 물이 들어오고 있어! 타츠미는 헛숨을 삼켰다. 어두운 기내가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현장으로 바뀌었다. 타츠미는 망설일 것 없이 몸을 숙여 앞 좌석 아래의 구명조끼를 꺼냈다. 마요이가 허둥대며 자신을 따라 했다.
"걸을 수 있겠어요? 탈출구 쪽으로 가야 해요."
"네, 네!! 거, 걸을 수 있어요.“
마요이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재빨리 일어나 좁은 복도를 따라 이동했다. 승무원들과 승객 몇몇이 사방의 비상 탈출구 문을 개방하고 있었다. 이미 줄을 선 사람들이 있었고, 아직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 보였으며, 간혹 충격에 기절한 사람도....... 타츠미는 이를 악물었다. 이 상황에서는 성인 노릇을 할 수도 없다. 자신이 희생하려 든다면, 그것은 뒤따라오는 마요이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가라앉는 기체의 바깥세상 또한 끔찍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강렬한 난기류는 이 폭풍에서 기인한 것이 분명했다. 과연 저 잔인해 보이는 바다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러나 선택권은 존재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타츠미가 나가야 하는 탈출구에는 슬라이드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물속에 뛰어든 뒤 구명보트에 올라타는 방법뿐이었다.
타츠미는 마요이를 한 번 돌아보고 고개를 끄덕인 뒤 곧장 입수했다. 시린 물이 급속하게 옷 사이로 스며들었다. 거친 파도를 가르고 헤엄쳐 구명보트를 붙잡고 뒤를 돌아보니, 뒤이어 뛰어내린 마요이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타츠미는 마요이가 근접하기까지 기다렸다가, 보트에 탄 사람들에게 그를 먼저 끌어올려 달라 부탁했다. 마요이가 먼저 보트에 올랐고, 곧바로 타츠미에게 팔을 뻗은 그 순간― 거대한 파도가 들이닥쳤다.
검푸른 물은 순식간에 타츠미를 삼켰다. 인간의 존재는 바다에게 한낱 유기물에 지나지 않았다. 더없이 무력했다. 휩쓸리는 순간, 마요이의 비명을 들은 것만 같았다... 그러나 차디찬 물은 곧 타츠미의 눈도, 귀도, 그리고 숨마저 빼앗았다. 타츠미는 작별을 직감했다.
그것이 마지막 기억이다.
"저는 타츠미 씨의 신은 아니지만... '이렇게라도' 타츠미 씨를 붙잡아 둘 수는 있었어요."
한참의 침묵 끝에 마요이가 대답했다. 타츠미는 그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정말이지 가련한 사람. 카제하야 타츠미의 유일한 사랑이자 미련. 당신을 아프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나, 타츠미는 또 이렇게 죄를 짓고야 만다.
"정말 그걸로 괜찮나요? 제가 마요이 씨의 모형정원에서 영영 잠들어 있는 것으로?“
타츠미는 그 어느 때보다 다정하게 물었다. 정말 자신을 그의 꿈꾸는 어린 양으로 두어도, 당신은 그걸로 만족할 수 있느냐고. 이곳은 그저 한 겹 환상일 뿐인 세계일진대 과연 당신은 여기서 안식을 찾을 수 있느냐고.......
한 쌍의 비취에 물기가 어린다.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조이고 목이 타는 것 같다. 하지만 타츠미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자신은 이러한 연유로 신을 찾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보아왔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고 신에게서 위안을 구하는 자들. 신께서는 믿는 자에게 눈물과 고통이 없는 새 거처를 약속하셨으나, 남겨진 자는 지상에서 상실의 고통을 감내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진정 그들을 구원하는 것은 신이 아니다. 신이 내리는 시련은 곧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 마음의 굴레를 벗어던지는 것은 스스로 해야만 하는 일. 사랑을 잊지 않되, 사로잡히지 말 것. 떠난 이를 기억하고 우리가 그들의 인생에 함께했다는 기쁨을 기억할 것.
타츠미는 자신이 그럴 수 있기를, 마요이 또한 그러하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제 영혼이 가야 할 곳이 있다면, 부디 보내주세요.“
바라건대, 당신이 망집을 버리고 온전한 위로를 찾기를.
결국 눈물은 흘러넘치고 말았다. 마요이의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이 안타까워, 결국 손을 들어 훔쳐내었다. 마요이는 하염없이 울었다. 울고 또 울다가,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해야 하는 걸 알고 있었어요. 알고 있었지만, 조금만 더.......“
함께 있고 싶었어요.
그 말이 비수처럼 아프게 마음의 연약한 곳을 찔러왔다. 타츠미는 감히 저도요, 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그것만이 절대적인 진심임에도 불구하고.
마요이는 예전 타츠미가 했던 그대로, 뺨을 감싸 타츠미를 살며시 끌어당겼다. 안녕, 타츠미 씨. 그가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타츠미는 자신의 입술 위로 젖은 입술이 포개지는 것을 느꼈다. 타츠미 또한 인사를 하려고 했으나―
아무런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숨조차도 쉴 수 없다. 사방이 흐리고 먹먹해진다. 마치 물속에 있는 것처럼. 그러나 찢어질 듯한 이명이 머릿속을 두드리듯 울려대고, 산소를 갈구하는 폐는 한계까지 부풀어 오른다.
그리고 타츠미는 세상에 처음 오던 그날처럼 오열을 토해냈다.
가까스로 눈꺼풀을 들어 올리면, 가물거리는 시야에 흰 것이 비쳤다. 초점이 맞자 그것은 명확해졌다. 흰 천장이다. 고개를 돌리면 시야를 가리는 커튼이 보였다. 얼굴이 불편한 감각에 움직이지 않는 손을 억지로 들어 확인해보니, 산소호흡기 같은 게 붙어있었다. 그제야 타츠미는 깨달았다. 이곳은 병원이다.
그렇다면 나는, 죽지 않은 건가? 합당한 추론이 머리를 스쳤다.
그 순간 커튼이 젖혀지며 낯선 사람이 나타났다. 아마도 간호사인 그는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곧장 바이탈 체크를 실시했다. 의사까지 와 한바탕 검사를 끝내고 나서야 타츠미는 자신이 여기까지 오게 된 경위를 들을 수 있었다. 지나가던 요트가 표류 중인 자신을 발견하여 구조한 뒤 병원으로 옮겨졌다고. 타츠미는 다급하게 간호사를 붙잡고 잠긴 목소리로 떠듬떠듬 비행기 사고에 대해 물었다.
"다른... 다른 생존자들은, 어디에 있나요?“
간호사는 억양이 강한 영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알아듣지 못할 수가 없었다. 그의 표정이 너무도 유감스러웠으므로.
"환자분께서는 혼자 이곳에 이송되셨어요. 다른 생존자들은... 수색을 했지만 아무도.......“
그의 흐려지는 말꼬리에 타츠미의 의식도 점차 아득해졌다. 손에 힘이 풀리며 잡고 있던 것을 놓아버렸다. 헝클어진 머릿속에 마요이가 남긴 말이 끝없이 맴돌았다.
이렇게... 해야 하는 걸 알고 있었어요.
타츠미는 그 말을 되뇌고 또 되뇌어본다. 그러나 천국은 이미 이곳에 없다.
지상에 남겨진 사람은 자신이다.
풍랑으로 당신을 만났고, 휩쓸렸고, 끝내 잠겨 영원한 안식을 얻었을진대, 어째서 당신은 바람처럼 떠나가며 나는 이 세파에 홀로 떠도는가.
파도에 삼켜진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