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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님 (@44sasa4) - [ 심해의 묵시 ]

1 풍랑으로 당신을 만났다

 

바다 위로 누운 달의 그림자가 파도의 움직임을 따라 형태를 잃었다 되찾기를 반복했다. 제각각 흩어졌다 다시금 모여 여울지는 물결과 소금기를 잔뜩 밴 바람이 배를 쥐고 흔들었다. 끼익, 끽. 어긋난 나무 판자들이 서로 마찰하여 미세하지만 거슬리는 소음을 만들어냈다. 그 위에 선 몸이 출렁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음에도 카제하야 타츠미는 그것이 썩 마땅치 않았다. 고요한 눈 뒤로 복잡한 감정들이 일렁였다.

 

*

 

대여섯 살쯤이었나. 아비의 손을 붙잡고 지금과 같이 커다란 배에 올랐다. 목적지가 어디인지, 배에 오른 연유가 무엇인지조차 몰랐지만 어린아이에게 처음 떠나는 항해만큼 설레는 일이 또 있을까. 바다는 완전하게 매혹될 만한 상대였다. 저항 없이 그 크고 깊은 너울을 사랑했다. 배에 오르는 그 모든 날들이 어린 타츠미에게 가장 큰 희락이었다.

 

그러니 그 일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제 아비의 뜻이었는지, 전능하신 신의 뜻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여느 날과 같이 찾아온 배 위의 어둠 속, 선수에 선 아비는 분명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대로 바다로 낙하했다. 다급히 난간에 매달린 제 눈 앞에서 바다가 시커먼 입을 쩍 벌린 채 날카로운 이를 드러냈다. 그 무엇도 없었던 듯 위로 뻗은 손이 삽시간에 거센 파도 사이로 사라졌다. 바다가 가졌던 모든 의미를 잃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끝없이 신에게 바라고 갈구했다. 아비를 돌려 달라고. 나를 혼자 둔 이유를 알려 달라고. 이 시련이 전부 당신의 뜻이냐고. 응답 없는 질문을 매일같이 되뇌었다. 되뇌이고, 되뇌이고, 되뇌인 10년. 그 이상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타츠미는 기어코 제 신에게 답을 얻어냈다. 긴 시간 속 마음의 울림과 혼동되었을지 모르는 그것을 신의 회답이라 굳게 믿었다. 모든 것은 당신이 세우시니 또한 당신의 뜻대로 하겠나이다.

 

*

 

그날처럼 배 위에 깊은 어둠이 내렸다. 바람과 여울이 부딪혀 생기는 파동만이 존재하는 시간에 타츠미는 뱃머리로 향했다. 그리고 마주했다. 가지런히 내려 땋아 바닷바람에 흩날리는 자색의 머리칼을.

 

 

 

 

 

2 심해는 알고 있다

 

희미하게나마 암흑을 메우는 달빛, 선수에 선 위태로운 몸, 그것을 관망하는 자신. 그때와 흡사한 모양새였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일렁이던 감정들은 원망으로 변모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고난을 주시는 걸까요. 신이시여, 당신이 보내신 건가요. 이것도 당신의 의미인가요.

 

그런데,

 

이상하다. 타츠미는 자리에 우뚝 서 낯선 인영을 가만히 응시했다. 확실히 이상했다. 파란 것이 길게 매달린 눈끝, 달빛 아래 모래알같이 반짝이는 뺨, 벌어진 입술 새로 보이는 날카로운 이. 괴이할 만큼 어둠 속에서도 분명하게 보였다. 무언가에 홀린 듯 느린 호흡으로 낯선 이에게 다가갔다.

 

 

“저어, 저…….”

 

 

지나치게 가까워진 거리감에 천천히 뒷걸음치던 그의 허리께가 난간에 닿았다. 갈 곳을 잃은 몸이 뒤로 휘었다. 땋인 머리카락이 허공에서 대롱대롱 흔들렸다. 타츠미는 두 손으로 난간을 단단히 붙들었다. 양팔 사이에 갇힌 얇은 몸뚱어리가 여리게 떨렸다.

 

 

“히익,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무도 없는 줄 알고……!”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잘게 떨리는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바다 냄새. 어린 소년을 설레게 했던 소금기 묻은 바람 냄새. 내리감은 눈꺼풀 속 암흑에서도 물결치는 파도. 그리고 정신이 아찔해지고 마는…….

 

 

“당신이군요. 당신이에요.”

 

 

공포감. 그 모든 것이 그였다. 바다의 매혹은 물론, 바다가 주는 지독한 두려움마저도 그였다. 찰나의 의심을 죄악으로 만드는 확연함.

 

의아함과 당혹감만이 혼재한 눈을 마주하며 타츠미는 확신했다. 기다림의 끝에 얻은 자신에게 내려진 ‘바다로 돌아가라’는 신의 계시. 그 정답을 찾았다고. 신이 보낸 나의 바다, 나의 구원. 내가 당신으로 인해 살 것임을.

 

 

 

 

 

3 다시 항해가 시작된다

 

그러니까, 아야세 마요이는 눈 앞에 있는 이 남자가 왜 이곳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해가 다 저물기도 전 선실 밖에 있는 것도 낯선 상황이었다. 생소한 광경에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그으, 타, 타…….”

“네, 카제하야 타츠미입니다. 마요이 씨.”

“타, 츠미 씨, 여기에 계속 계시는 건가요오…….”

 

 

기껏 꺼낸 말은 앞으로 뻗어나가지 못하고 바닥을 기었다. 마요이는 고개를 푹 숙였다. 지금껏과 다른 결의 시선이 닿는 것이 견디지 못할 만큼 불안했다. 역시 나오지 말 걸 그랬어. 불경한 나에게 이런 관심이라니, 있어서는 안 될 일인데.

 

속으로 하는 생각이 무색하게 여전히 타츠미는 같은 낯으로 미소 지을 뿐이었다. 마요이는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품이 커 손바닥까지 올라오는 옷 소매를 쥐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뾰족한 윗니가 입술을 찢고 피를 내기에 이르러서야 타츠미가 입을 열었다.

 

 

“좀 쉬는 게 좋겠군요. 밤이 오면, 만나 주시겠습니까?”

 

 

몰아치던 자책이 무너지고 저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

 

수평선 뒤로 해가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망망대해 위 한정된 공간에서 갈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다시 그 뱃머리. 마요이는 난간을 붙잡고 섰다. 밤바다를 가득 머금은 바람이 뺨을 간질였다.

 

 

“마요이 씨.”

 

 

갑작스레 불린 이름에 등골까지 소름이 돋았다. 아아, 이래도 되는 걸까요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타츠미가 짧게 거리를 두고 마요이의 옆에 나란히 섰다. 마요이의 몸이 긴장으로 잔뜩 굳었다. 간신히 고개를 슬쩍 틀어 타츠미를 힐금거리며 곁눈질했다. 감정 없는 옆얼굴이 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한참을 어떠한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파도 소리가 침묵 사이로 밀려들어 왔다.

 

 

“……. 처음엔 아버지와 같은 행위를 말하는 줄 알았습니다. 어쩌면 아버지도 같은 계시를 받았을지도 모른다고 말입니다. 제가 본 건 신의 뜻이자 아버지의 순종이었겠죠.”

 

 

고요를 깬 그의 목소리가 반갑기도 잠시,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에 바다로 가만히 내려 두었던 시선이 다시금 타츠미에게로 향했다.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마요이 씨를 보자마자 알았어요.”

 

 

불명한 감정들로 점철되었던 얼굴에 드디어 희미한 미소가 올랐다. 부드러운 손바닥이 조심스럽게 마요이의 손등을 감쌌다.

 

 

“부탁드립니다. 저에게는 당신이 필요해요.”

 

 

미약하게 떨리지만 굳건한 목소리. 손등을 감싼 손에 차츰 힘이 들어갔다. 물속 아주 깊은 곳이 거세게 요동쳤다. 지나치게 오랜 시간 증오해 마지않던 바다, 그 바다.

 

바다를 다시 사랑하게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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