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돔 님 (@real_doldom) - [ 평범에 대한 이야기 ]
카제하야 타츠미로 말할 것 같으면 잔잔한 호수와도 같은 사람이었다. 어떤 파문이 그 위에 일더라도 금방 잔잔해져 이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깨끗하게 제 위의 하늘을 비춘다. 옥빛의 호수라,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동식물은 평화로운 그의 곁으로 모여 생태계를 꾸미고, 사람들은 무엇도 해치지 않을 그 물을 끌어와 제 목을 축인다.
그런 풍경을 상상하고 있자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인간은 대체로 변하지 않는 것, 안정적인 것들을 갈망해왔으며 흔들리지 않는 기둥에 기대어 서는 것을 즐겼다. 실상 끌어안은 것은 자신들과 다를 바 없는 또 하나의 인간에 불과한데도. 어쩌면 타츠미도, 이 사실을 은연중에 외면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해낼 수 있다고. 이 모든 것을 짊어질 수 있다고. 외면의 결과는 처참했다.
그리하여 지금에 이르러, 타츠미는 자신이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을 매우 잘 인지하고 있다. 여전히 호수와도 같은 사람이지만, 그는 사람이다. 때때로 과거의 버릇들이 튀어나오긴 했지만, 저와 함께하는 소중한 사람들 덕에 그는 마냥 무언가를 견디고, 내어주는 호수가 아닌 사람으로서 땅에 발을 딛고 서 있을 수 있었다.
최근 타츠미에게는 고민이 하나 있었다. 인간관계에 대한 것이었는데, 주로 타인에게 그런 문제에 대한 조언을 해주는 타츠미이니 어찌 보면 의외라 할 수 있겠다. 다행히도 원인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평범하게 마음에 드는 사람이 생겨 그의 마음에 들고 싶어진 것 뿐이었다. 옆에 서 있으면 심장이 두근거렸고, 그 사람이 스쳐 지나가면 눈앞에 잔상이 아른거렸다. 꿈에서는 다정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며 아름다운 청록의 눈으로 수줍게 그를 바라본다.
꿈을 꾸고 일어나면 한참을 제 멋대로 날뛰는 마음을 부여잡고 앉아있어야 했다. 동실을 사용하는 이들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 평소와 같은 온화한 표정을 짓고 눈을 지그시 내려감았으니 아마도 그저 기도하는 모습으로 보이겠지만… …. 그 생각의 끝은 그의 신이 아닌 그가 좋아하는 바로 그 사람이었으니 어찌 보면 불경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머리 위의 신보다 눈앞의 사람이 가까운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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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식사를 마치고 연습실로 향하면 불어오는 바람에 기분이 들뜬다. 조금 있으면 마요이를 만나게 되겠지. 오늘은 어떤 표정으로 그를 맞이해줄까. 많은 사람들은 마요이가 늘 우중충하고 음침한 표정만 짓는다고 생각하지만, 타츠미의 눈에는 그 사이사이에 깃든 미세한 다른 감정들이 비쳤다. 이를테면 레슨 도중에 보이는 엄격함, 그 이후의 뿌듯함이라던가. 타츠미가 다가섰을 때 들이키는 급한 숨에는 이따금 부끄러움이 깃들곤 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숭고한 일이요, 쟁취니 승부니 하는 단어와는 거리가 있었으나 타츠미는 자신에게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언뜻 드러나는 마요이의 감정은 긍정의 뜻을 품고 있었기에. 미처 어른이 되지 못한 소년의 뇌는 첫사랑에 푹 빠졌고, 툭하면 장밋빛 상상에 잠기기 일쑤였다. 이 지점에서 의구심 하나가 든다. 타츠미는 전혀 불안하지 않은가?
타츠미는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동시에, 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낭만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겉으로 보았을 때 카제하야 타츠미는 다정하고, 상냥해서 사람의 호감을 살 수 있는 인물이다. 게다가 이것은 거짓된 모습도 아니니, 적어도 일정 거리까지 다가가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으리라. 가랑비에 옷이 젖듯, 타츠미는 그렇게 마요이와 가까워질 생각이었다.
결론만 말하자면 타츠미의 이 계획은 꽤 성공적이었다. 마요이는 다가오는 타츠미에게 익숙해졌고, 조금이나마 곁을 내어주었다. 이를 처음 알게 된 날, 타츠미는 기숙사로 돌아가며 저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던 것도 같다. 마요이가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냐 물었을 때엔 그러게요, 라는 의뭉스러운 답을 내놓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어쩌면 다정하고 상냥해서 호감을 살 수 있는 인물은 마요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비록 약간의 진입장벽이 있고, 툭툭 튀어나오는 변태적 면모가 있긴 했지만 그 기저에는 늘 다정함이 자리하고 있었으니까. 알면 알수록 사랑스러운 사람이구나, 그 생각이 문득 말로 튀어나왔을 때는 타츠미도 조금은 당황해버렸다. 금방 수습되어서 정말이지 다행이었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 게다가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상흔을 안고 있다면 더욱 그렇다. 타츠미는 최근에서야 이 사실을 깨달았고, 그제야 덜컥 겁이 났다. 여기서 더 무언가를 바라게 된다고? 마요이가 타츠미를 좋아해 주기를, 그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오기를 원한다고? 문득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물은 부드럽고 따뜻하다. 모든 생명의 근원이요, 이 지구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사랑이다. 다만 타츠미는 더이상 호수가 아닌 인간인지라, 제게 밀려들어 올 물에 겁먹고 마는 것이다. 그는 베푸는 법은 알되 올바르게 받는 법을 알지 못했고, 그래서 자신이 바라는 다정에 익사하진 않을지 걱정해야 했다. 이미 뗀 걸음은 돌이킬 수 없으니 계속,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수 밖에는 없다. 선택의 시간이다. 무책임하게 도망칠 것인지, 아니면 기꺼이 모험을 택할 것인지.
"잠시 제 이야기를 들어주실래요?“
홀린 듯 그 말을 꺼낸 건 잠기고픈 충동이었을까. 만약 거절당한다면 물러설 수 있을 것이라는 떠넘기기에 불과했을까. 타츠미는 생각보다 자신의 많은 부분을 마요이에게 흘려보내고 있었으며, 그 범람은 이제 단 한 방울 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넘쳐흐르거나, 아니면 그대로 전부 집어삼켜 말라붙이거나.
그 때에 마요이는 조금 당황했던 것도 같다. 늘 그 틈에서 다른 감정을 발견해 내던 타츠미였으나 이번에는 도저히 그럴 여유가 생기지 않았다. 숨이 가쁘다. 무언가가 턱 밑까지 차오른 것 같았다. 표정은 간신히 평정을, 안온한 그 표면을 유지하고 있으나 그 밑에는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조류가 흐른다. 1초, 2초, 영원 같은 순간이 천천히 목을 감싸 쥔다.
따지고 보면 이상한 일이다. 원하는 쪽은 타츠미인데, 정작 타츠미 자신은 마요이가 긍정의 답을 던질까 두려워한다. 마치 거절을 바라는 것처럼. 혼자의 힘으로는 단념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먼 길을 걸어와 버렸다. 이 앞으로 나아가려면 자신이 숨기고자 했던 것을 내보여야 하고, 그 과정은 몹시 느리고 고통스러우리라.
수락은 곧 다정이 되어 타츠미의 몸 안으로 밀려들어 온다. 뭍의 사람은 물에서 호흡하는 법을 알지 못하기에 자신을 죽이는 숨을. 물 숨을 들이킨다. 하지만 당신이 그런 물이라면 나는 몇 번이고 잠겨 죽을 수 있어. 그런 체념을 마음에 품고서 타츠미는 느리게 눈을 감고, 제 이야기를, 어둠을 토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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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야세 마요이로 말할 것 같으면 부드러운 물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바다에 흐르는 여울은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제 위에 떨어진 것들을 다정히 끌어안아 준다. 제게 잠겨 드는 사람도, 마음도. 뻗어진 손길이 저를 붙잡기 위함인지, 혹은 붙잡아달라는 의미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마요이의 다정은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처음에는 두려움이었고, 그다음은 호기심이었으며 종착지는 타츠미가 뱉어낸 숨과 꼭 같은 무게의 사랑이었다. 타츠미의 폐부에 자리 잡아 그의 어둠을 어루만지고 있자면 타츠미는 곧 자신이 다다른 곳이 질식이 아님을 인지한다. 굳이 따지자면 물에도 녹아든 산소는 있기 마련이다.
물이 없으면 호수는 성립되지 않는다. 두 사람은 그런 비유법이 아니더라도, 서로를 필요로 한다. 맞잡은 손에 누가 먼저, 라는 수식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전해지는 온기에, 마요이는 자신이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실감한다. 여전히 물과 같은 사람이지만, 그는 사람이다. 때로는 좁은 곳으로 숨어들고 자신이 누군가의 숨을 틀어막지는 않았는지 고민하지만, 그의 본질이 남들과 같은 평범함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제 옆에서 숨 쉬고 있는 소중한 이들이 그를 증명했다.
머리 위의 신보다, 한참을 가야 보일 바다보다, 바깥에 나가서야 보이는 호수보다 가까운 것은 눈앞의 사람이다. 불어오는 바람이 따스하다. 이 땅 위의 생명을 어루만지고, 연을 이어주는 숨결이 부드럽다. 물 숨을 들이킬 이여, 사랑에 잠겨 죽을 이여.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사랑스러운 삶이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사랑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