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요 님 (@tayo_Alkal)
사람들은 대게 자주 찾는 물건이 아니라면 손이 잘 닿을 필요가 없는 곳에 보관한다. 이를테면 잘 읽지 않아 뽀얀 먼지 내음 폴폴 나는 책을 책장 제일 윗부분이나 아랫부분에 놓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자주 찾는 물건이 아닌 이것을 우리는 감히 쓸모없는 것이라 이를 수 있을까.
자주 찾지 않는다는 것은 쓸모없는 것이 아니다. 그저 문자 그대로 자주 찾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었다. 그러면 왜 자주 찾지 않는 것일까. 그것에 대한 이유는... 글쎄, 잘 모르겠다. 모양도 크기도 천차만별인 이것들이 어떠한 이야기를 품고 있는지는 우리로서는 모른다. 그저 저마다의 이야기를 지닌 채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는 사실만 알 뿐.
어찌 되었거나 이렇게 자주 찾지 않는 물건들은 대게 방치라는 딱지를 붙인 채 천천히 가라앉은 먼지를 껴안곤 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타츠미에게도 통용되는 말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타츠미의 손에 쥐인 하얀 먼지가 살짝 내려 앉은 짙은 자색 앨범을 무어라 설명한단 말인가.
우연찮게 발견한 앨범을 들어 올린 타츠미는 책상 앞에 앉았다. 자리로 가 앉는 걸음을 보아하니 저 앨범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기 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였다. 앨범을 향해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은 타츠미는 앨범 표지에 앉은 먼지를 반대쪽 손등으로 살짝 털어내고선 찬찬히 표지를 열었다.
"후후... 오랜만이네요."
두꺼운 표지 너머는 흰색과 검은색, 그리고 그 둘을 적당히 섞어 놓은 듯한 색으로 가득히
채워진 사진이 행과 열을 맞춘 채 끼워져 있었다. 크기도 모양도 색도 비슷하기 그지없으나 그 안에 담긴 세상은 전혀 다른 모습을 띠고 있었다.
직사각형 모양 액자 안에 담긴 세상을 내려다보는 타츠미의 눈이 천천히 제 기억을 더듬었다. 앨범과 마찬가지로 차곡차곡 쌓인 채 한쪽에 놓였던 그날의 기억을. 조심스레 들어 올려 뽀얀 먼지를 털어낸 기억은 선연한 빛을 내뿜었다.
선연히 빛나는 기억이 타츠미의 손길을 통해 회색빛 사진 위에 덧칠해졌다. 아아, 맞아. 그날은 분명 따스한 쪽빛을 가득히 품고 있는 어느 날이었죠. 어디 그뿐 만인가 그날의 기억 끝에는 무려 '그 일'이 있었는데, 이를 타츠미가, 그 카제하야 타츠미가 잊었을 리가.
연청색 물감으로 풀어낸 하늘은 더 없을 정도로 선명한 빛을 냈다. 푸른 하늘 위엔 하얀 물감을 듬뿍 발라 찍어 누른 뭉게구름이 보기 좋게 그려져 있었다. 그런 하늘의 정중앙에 선 태양 빛이 강렬하게 내리쬐는 오늘, 타츠미는 벤치에 앉아 제 발등 위에 생긴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따스한 빛을 지닌 해님은 제 머리 위에 울창한 가지를 뻗은 나무를 사랑했다. 그의 사랑은 감히 타츠미로서는 짐작할 수 없는 정도였기에 타츠미는 그저 그림자를 바라보며 나무를 향한 사랑이 총총히 쌓은 잎사귀로는 미쳐 다 담지 못할 정도임을 짐작할 뿐이었다.
타츠미는 파도와 같이 넘실거리는 나무의 그림자와 그가 받은 해님의 사랑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사랑이네요. 그렇죠? 타츠미의 물음에 화답하듯 살랑이는 바람이 타츠미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타츠미는 가방에서 구식 필름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카메라를 눈앞에 가져다 댄 타츠미는
카메라의 초점을 맞추며 오른쪽 눈꺼풀을 내렸다. 귓가에 스치는 바람을 탄 그들의 속삭임을 들으며 타츠미는 셔터를 눌렀다. 새로이 넣은 필름 속에 오늘도 타츠미의 기억이 담겼다. 이는 후일 추억이라는 이름이 되어 타츠미에게 다가올 것이었다.
카메라를 정리한 타츠미는 나무와 해님의 사랑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타츠미는 천천히 앞을 향해 걸어 나갔다. 타츠미는 어느새 훌쩍 가버린 바람을 바라보며 그저 앞을 향해 걸었다. 딱히 바람을 따라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바람이 있는 곳에는 타츠미가 있으며, 타츠미가 있는 곳에는 바람이 있을 뿐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타츠미가 앞을 향해 걸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까르르 웃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날아와 타츠미에게 닿았다. 어쩌면 웃음소리를 싣고 온 바람이 일부러 타츠미의 앞에 온 것일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타츠미는 발길을 돌려 바람이 이끄는 곳을 향해 걸었다.
오랜만에 듣는 즐거운 소리네요. 아이들은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이곳과는 시차가 많이 나니 아마 단잠에 빠져 있겠지요. 신이 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점차 커지며 아이들이 있는 곳에 가까워지자 허공 위엔 오색 구슬이 둥실둥실 춤을 추고 있었다.
구슬 뒤에 서 있는 아이의 아버지로 보이는 사람이 조그마한 빨대를 들어 숨을 불이 쉬자
조그마한 구멍에서 나온 비눗방울이 바람을 타고 날았다. 아이들은 그 조그마한 비눗방울을
만져보겠다며 폴짝폴짝 뛰며 비눗방울을 터트렸다.
퐁- 하며 터지는 비눗방울에 아이들의 얼굴엔 활짝 핀 센트레아같은 미소가 지어졌다. 그런
모습을 놓치기 싫다는 듯 아이들의 바라보던 타츠미의 눈이 깜박였다. 찰칵-. 귀여운
아이들이네요. 타츠미의 입가에 흰 미소가 걸렸다.
다 터져버린 비눗방울에 아이의 아버지는 다시 비눗물에 담근 빨대를 들어 숨을 내쉬었다. 작은 구멍에서 나온 비눗방울 하나가, 조그마한 세상을 품은 동그란 비눗방울 하나가 두둥실 날라와 타츠미의 어깨에 닿았다. 톡, 비눗방울이 터졌다. 비눗방울을 쫓아 폴짝폴짝 뛰던 아이들은 그제야 타츠미를 보았다.
양갈래 머리를 한 아이가 배시시 웃으며 타츠미에게 손을 흔들었다. 타츠미는 저도 모르게 손을 흔들며 아이의 인사에 회답했다. 그러자 아이는 타츠미를 바라보며 어서 와 같이 놀자는 듯 손짓했다. 타츠미는 고개를 돌려 좌우를 살폈다.
무심코 방금 전에는 저도 모르게 인사하고 말았네요. 지금 제 옆엔 아무도 없으니 제 생각이 맞는다면 저를 향해 인사한 것이겠군요. 그렇다면 저 손짓은 저를 부르는 뜻인 걸까요. 아이의 손짓에 타츠미는 웃으며 검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es que me?''
"Así es, vamos a jugar juntos.“
자신이 맞냐며 묻는 말에 아이는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본가의 아이들과 놀아준 적은 있습니다만... 타츠미는 기억을 더듬어 본가의 아이들과 놀아주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타츠미가 저 사이에 끼어도 되는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는 찰나 파란 티셔츠를 입은 아이가 무엇이 그리 답답했는지 타츠미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아이는 타츠미의 손목을 덥석 붙잡으며 자신들이 놀았던 곳으로 타츠미를 끌고 왔다. 아이의 키에 두배는 훌쩍 넘는 타츠미가 아이에게 붙잡힌 채로 질질 끌려온 모습이 웃기는지 빨간 모자를 쓴 아이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졸지에 아이들이 노는 곳에 와버린 타츠미가 아이들의 아버지로 보이는 이에게 제가 여기
있어도 괜찮냐며 묻자 그는 웃으며 아이들과 함께 놀아달라며 말했다. 타츠미는 아이들의
아버지가 건네는 빨대 하나를 받으며 함께 비눗방울을 불었다.
후후, 비눗방울을 부는 건 오랜만이네요. 두배로 늘어난 비눗방울의 양에 아이들은 전보다
즐거워하며 까르르 웃었다. 타츠미는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며 웃었다. 찰칵, 필름 위에 또 다른 기억이 칠해졌다.
웃음소리로 가득했던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타츠미는 다시 앞을 향해 걸었다. 타츠미의 걸음이 닿는 이곳은 강렬한 원색의 페인트로 칠한 벽과 여러 가지 색으로 물을 들인 벽돌로 쌓아 올린 벽이 양옆 가득히 줄을 서 있었다. 각기 다른 모습을 한 건물이 즐비 된 풍경은 타츠미가 나고 자란 고향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특히나 원색의 페인트로 칠을 한 벽과 상아색 벽돌을 쌓아 만든 벽이란 도무지 제 고국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나름 여기서 지낸 시간이 있어 익숙해진 줄로만 알았습니다만, 몇 번을 보아도 그 색이 바래지는 않네요.
어디 벽뿐만인가. 도로 위를 달리는 차도 희거나 검은 무채색이 아니었다. 벚잎을 닮은 색과 단풍을 품은 색, 높푸른 하늘과 우거진 파아란 숲의 빛깔로 서려 있는가 하면 저 노부인의 가방 색과 꼭 닮은 색까지 도로 위엔 저마다 다른 색 옷을 입은 차로 가득했다. 그야말로 색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어디 오색 찬란한 색뿐일까. 거리를 둘러보며 걷는 타츠미의 귓가에 흥겨운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타츠미의 두 다리는 노랫소리를 따라 골목 이곳저곳을 활보했다. 어디서 들려오는 노래일까요. 어느새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근원지에 도착한 타츠미는 노래를 부르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저마다 다른 모양, 다른 빛을 내며 서 있는 골목 끝에서 들려온 낯선 이국의 노래. 멜로디도 노랫말도 타츠미에겐 그저 한없이 낯설 뿐이었지만 노래를 부르는 그들의 목소리에 담긴 미소는 타츠미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얇은 여름용 셔츠 위에 똑같은 색의 페도라를 쓰고 노래를 부르는 이들은 저마다 다른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열정으로 가득한 손때가 묻은 통기타와 카혼, 이들과 함께 바람을 딛으며 이곳에 온 클라베스 그리고 하모니카.
타츠미에게 익숙한 악기와 낯선 악기가 어우러진 음악은 타츠미의 마음을 들썩이기에는 충분했다. 타츠미는 이들이 무엇을 노래하는지는 몰랐다. 그러나 그들의 노래 속에 담긴 마음은 알 수 있었다. 타츠미는 음표가 내미는 손을 잡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찰칵, 타츠미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타츠미는 노래가 끝나자 주변에 선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그들을 향해 박수를 쳤다. 다른
이들과는 달리 양손을 내려놓지 않은 타츠미는 연주하고 노래한 이들을 향해 사진을 찍는 듯한 손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사진을 찍어도 괜찮을까요.
그런 타츠미의 손 모양을 알아본 그들은 쾌활하게 웃으며 "Por supuesto!" 라며 흔쾌히 허락을 했다. 그들의 허락이 떨어지자 타츠미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가방에서 구식 필름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카메라를 들어 제 눈앞에 가져다 댄 타츠미가 오른쪽 눈꺼풀을 천천히 내렸다. 이제 타츠미에게 남은 렌즈는 단 하나.
동그란 자색의 렌즈 너머에 있는 세상이 카메라 안에 담길 수 있도록 타츠미는 조심스레 허리를 숙였다. 오른쪽으로 세 걸음 뒤로 두 걸음. 자세를 잡은 타츠미가 익숙한 손길로 렌즈의 초점을맞추었다. 동그란 자색의 렌즈와 카메라의 렌즈 안에 담긴 세상이 일치하는 바로 이 순간. 지금이에요. 타츠미의 입가에 선명한 호선이 그려졌다. 찰칵-.
눌린 셔터와 함께 필름 안에 들어간 세상은 흑과 백으로 가득할 것이다. 아니, 가득하다. 그러나 필름 안에 담긴 세상이 흑과 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들 동그란 두 눈 안에 담겨 마음속 깊은 곳으로 들어간 세상은 여전히 형형색색의 빛으로 가득하니 이는 타츠미에게 있어 문제 될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사진에 들어간 색이 다채롭고 선명할지언정 그의 눈동자에 담긴 색보다 다채롭고
선명할까. 타츠미에게 있어 최고의 렌즈는 그의 두 눈이며 최고의 필름은 그의 마음이었다.
그러니 타츠미가 들고 있는 이 카메라의 렌즈와 필름은 그저 먼 훗날 발견할 앨범 속에 든
추억을 상기시키기 위한 매체에 불과했다.
셔터를 누른 타츠미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허리를 들었다. 익숙한 손길로 가방 지퍼를 한손으로 연 타츠미는 으레 그렇듯 정해진 위치에 카메라를 집어넣었다.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낸 타츠미는 지폐 두 장을 꺼내 앞에 놓인 기타 케이스 안에 넣었다.
"gracias."
"Eres bienvenido."
그들은 타츠미의 미소에 화답하며 다음 곡을 연주했다. 귓가에 흐르는 노래를 뒤로한 타츠미는 가방을 고쳐 매고 다시 앞을 향해 걸었다. 목적지는 모른다. 자신의 두 다리는 그저 마음이 닿는 대로 걸을 뿐이었다. 그는 바람과 같은 사람이었으니.
계속해서 나아가는 타츠미는 그렇게 유명하다며 소문난 관광지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타츠미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아름다운 분수대도, 섬세한 손길이 닿은 조각상도 심지어는
이름난 성당도 아니었다. 그저 아이들이 뛰어노는 골목과 마음을 노래하는 소리가 들리는 곳 그리고 타츠미가 사랑해 마지않는 그런 모든 것들의 숨이 닿는 곳이 타츠미의 마음을 움직일 뿐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타츠미의 등 뒤로 줄줄이 줄을 선 가로등에서 노란 달빛과도 같은 빛이 흘러나왔다. 옆에 있는 식당에선 이름 모를 재즈가 와인잔을 부딪히는 소리와 하나가 되어
흘러나왔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요. 제 손목에 걸린 시계를 바라본 타츠미는 가까운
가게로 들어가 샌드위치 하나를 사서 나왔다. 불그스름한 갈대가 흩날리는 하늘을 바라보며
타츠미는 근처 벤치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뒷정리까지 마친 타츠미는 벤치에서 일어났다. 그때 타츠미의 앞에 바다를 잔뜩 머금은 바람이 타츠미의 품 안에 파고들었다. 흰 티 위에 걸쳐 입은 여름용 셔츠가 바람을 타고 펄럭였다. 후후, 시원한 바닷바람이네요. 근처에 바다가 있는 모양이니 한번 바다를 보고 가는 것도 괜찮겠지요. 바람의 손길에 작게 웃은 타츠미는 시원한 바람이 일러주는 곳을 따라 바람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
그러자 저 멀리 뭍을 만나 인사하는 바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다가와 다시 천천히
돌아가는 바다의 걸음은 경쾌하지 그지없다. 언제 바다로 달려간 것인지 타츠미의 손을 잡고 있던 바람은 그 짧은 새 바다와 한바탕 놀고서 다시 뭍을 향해 오는 바다의 손을 잡고
타츠미에게 쪼르르 달려왔다.
타츠미에게 다가온 시원한 바닷바람은 키득거리며 타츠미의 머리를 잔뜩 헤집어 놓았다. 짓궂은 바람은 다시 바다의 손을 잡고 저 멀리 바다 한 가운데로 쏙 들어가 버렸다. 이런, 머리가 헝클어져 버렸네요. 타츠미는 손을 들어 적당히 머리를 정돈하곤 바다 한 가운데로 쏙 들어간 바람을 바라보았다. 후후, 마침 땀이 많이 나 덥다고 생각한 참이었는데 잘 되었네요 고마워요.
제 앞에 뻗은 광활한 바다의 따스한 품을 바라본 타츠미는 바다의 손길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바다가 가리키는 손끝에는 하얀 달 허리를 베어낸 것만 같이 길게 뻗은 백사장이 있었다. 이를 본 타츠미의 얼굴엔 어린아이 같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후후... 그래요. 바다만 보고 가는 건 많이 섭섭하겠죠?
타츠미는 곤장 제 신발을 벗었다. 메고 온 가방의 허리춤에 신발이 떨어지지 않도록 꼼꼼히 묶어 두고서 앞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천천히 걷는 그의 발걸음에 조금씩 속도가 붙었다. 묘하게 들뜬 타츠미의 발걸음은 마치 비눗방울을 보고 뛰어놀던 아이들의 발걸음과 비슷했다.
바다 앞에 놓인 살짝 젖은 뽀얀 모래에 발을 디디자 타츠미의 걸음은 전과 달라졌다. 걸어간다기 보다는 마치 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 그래, 타츠미의 걸음은 이제 왈츠를 추는 스텝과 다를 바 없다.
그저 왼발을 앞으로 뻗고 오른발 역시 덩달아 끌어 올린다. 오른발을 옆으로 뻗는다. 왼발은 미끄러지듯 자연스레 오른발 옆으로 왔다. 왼발이 올라오기 무섭게 거침없이 앞으로 뻗는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전과 같이 발을 뻗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천천히 조금 빠른 속도로.
파트너는 필요 없다. 발걸음을 이끄는 모래의 리드에 맞추어 그저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발가락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모래알이 발가락을 간지럽혔다. 후후, 하며 작은 웃음소리를 내면 모래 역시 덩달아 웃었다.
그래, 어쩌면 이곳은 무대일지도 모른다. 여행을 떠난 주인공의 메인 이야기가 펼쳐지는 주 무대, 무엇인가 새로운 만남이 있을 것만 같은 황홀경으로 채워진 무대. 무엇이 정답인지는 상관없다. 그저 무대 위 흐르는 바다의 선율만이 들릴 뿐.
넘실대는 바다의 손끝에 따스한 모래가 닿아 하모니가 생겼다. 귓가를 울리는 감미로운 화음을 들으며 타츠미는 그저 그런 둘의 모습을 바라봤다.
둘이 만나 하모니를 자아내는 그 짧은 찰나에 시원한 바닷물이 타츠미의 발끝에 닿았다. 영락없이 둘 사이에 끼인 모양이었다. 함께 있던 모래는 촉촉이 젖어 발바닥을 간지럽혔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키득거리는 모래는 타츠미의 발을 끌어당겨 제 위에 놓았다.
선명한 발자국이 찍혔다. 후후, 발자국이 선명하게 잘 찍혔네요. 모래 위에 찍힌 타츠미는 제 발자국을 바라보았다. 찰랑대는 바다 위 파도가 올라오듯 하이얀 눈이 쏟아지던 그날 하얀 눈 위에 찍혔던 아이들의 발자국이 타츠미의 수면 위로 올라왔다.
둘이서만 있어 심통이 난 것이었을까. 아니면 제게 관심 하나 주지 않고 딴 생각을 하는 타츠미를 보아 그러는 것일까. 자리로 돌아가 현을 끌어당기던 바다가 쪼르르 다가와 발자국을 지워버리고서 만족스럽다는 듯 웃으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어린아이 같은 바다의 모습에
타츠미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하얀 달의 허리를 빌려 만든 좌우로 길게 뻗은 스테이지 위의 댄서는 모래, 아름다운 선율을 자아내는 연주자는 푸른 드레스를 입은 바다, 하모니를 만들어 코러스를 하는 이는 저 멀리 총총히 서 있는 나무, 선명한 빛을 내는 하늘이 스포트라이트가 되는 이곳은 무대였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닌 이런 아름다운 '무대 위'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이곳에 온
타츠미는 그저 관객이기에 그가 알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무대를 둘러보며 구경하는 것이
지나지 않았다. 타츠미는 그저 느릿하게 두 눈을 깜박이며 셔터를 눌렀을 뿐이었다.
앞을 향해 걷는 타츠미의 발이 멈춰 섰다. 우뚝 선 타츠미는 귓가에 들려오는 음악에 집중했다. 무대 위에서 연주를 하는 것은 바다뿐만이 아니었다. 바다보다는 조금 더 높은 음을 지닌 또 다른 이가 있었다. 그래, 조금 더 높고, 더 얇고 가는 소리를 내는 이가.
아아, 이 아름다운 무대 위에 아름다운 음악을 자아내는 이는 누구인 걸까요. 어쩌면 이 무대의 주인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새로운 만남이 있을 것만 같은 두근거림에 휩싸인 타츠미는 천천히 발을 떼며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걸었다. 그래, 소리를 쫓아 걸어가는 타츠미의 발걸음은 여울을 만난 바람이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웠다.
이토록 아름다운 소리에 이끌려 온 것은 비단 타츠미 뿐만이 아니었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저기 저 건물 사이에 걸려 있던 커다란 태양이 어느새 이곳까지 온 것인지. 숨이 차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기 위해 푸른 바닷속으로 빠져드는 태양이 제 옆에 있었다.
붉게 달아오른 태양의 얼굴을 바라보던 타츠미는 태양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타츠미는 태양의 시선 끝, 다시 말해 제 앞에 선 이를 바라곤 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제 앞에 서 있는 이는 떠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은은히 빛나는 달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바이올린을 켜고 있었다.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활을 따라 움직이는 머리카락은 저 모색에 젖은 하늘을 땋아 내렸다.
어쩌면 저 사람이 이 무대 위의 주인공이 아닐까. 이보다 더 무대에 걸맞은 이가 있을까. 아니, 타츠미는 이미 그가 무대 위의 주인공이라 확신했을지도 모른다. 붉은 노을 빛으로 물든 타츠미의 얼굴과 함께 타츠미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그간 타츠미의 마음을 움직인 것들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빠르게.
바이올린을 따라 그의 몸이 움직였다. 그가 몸을 틀어 몸의 정면이 타츠미를 향할 때 그의
눈꺼풀이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찰칵-, 그 순간 타츠미의 적안이 그의 푸른 눈동자와 얽혔다. 태양이 바다에 녹아내렸다면 태양이 녹아내린 바다는 그의 눈 안에 서려 있었다. 바다가 깃든 눈동자를 바라보는 타츠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 아름, 다워요."
"s, si? qué dijiste...?"
갑작스레 들려온 말에 그는 활을 들어 올리며 저도 모르게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푸른 머리의 사람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확인하자마자 그는 다급히 활을 내려 제 앞에 서 있는 이를 힐끗 바라보며 곧바로 시선을 돌렸다. 발밑의 하얀 모래알이 새카매질 정도로 뚫어져라 바라보는 눈동자와는 달리 그의 머릿속은 정처 없이 빙글빙글 돌고 돌았다. 다시 말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르고 고르는 중이었다.
빨간 태양 빛에 그림자가 진 까만 얼굴을 떠올리며 그는 곧 있으면 쏟아질 말을 짐작하며
자책했다. 이 해변이 제건 아니지만... 무, 물론 제 것이었으면 하는 그런 불경한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에요. 애초에 이 바다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닌걸요오... 분명, 이 해변엔 아무도 없었-. 아아, 인적이 드문 곳이라 안심했던 것이겠죠. 언제든지 다른 사람들도 충분히 올 수 있는 곳인데... 결국 제 욕심이 넘쳐나 이런 일이 벌어지고 말았어요... 역시 저 같은 건...
"... lo siento I mal, I didn't mean bad I made a speech mistake without realizing it. I'm so sorry lo siento mucho.“
혼란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떨구는 그에 타츠미는 다급히 입을 뗐다. 나쁜 뜻이 아니었다며
횡설수설 내뱉는 타츠미의 모습은 정말이지 좀처럼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그래, 그 모습을 굳이 비유하자면 마치 새빨간 얼굴을 한 아이가 학교 뒤뜰에 서서 좋아하는 아이에게 고백하는 모습과 닮았다. 물론 타츠미는 언제나 고백을 받는 쪽인 사람이었으니 이는 어디까지나 말이 그렇다는 거다 말이. 그도 그럴 게 언제나 여유롭다는 듯 미소 짓는 그 타츠미가 이토록 당황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미안하다는 듯 눈썹을 내린 채 차분히 제 뜻을 전하는 타츠미의 모습은 다른 이들은 도대체
어느 점이 당황한 것인지 의문을 표할 정도로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이국의
언어를 섞어 쓰는 것 하며 고개를 조금만 내리면 보이는 혼이 날까 겁이 난 어린아이 마냥 작게 꼼지락 거리는 손가락까지 그의 몸 곳곳이 당황스러움으로 가득했다. 그래, 타츠미의
마음속에서부터 새어 나온 당황스러움은 손가락 사이사이로 흘러내렸다.
하여튼 타츠미가 그러는 사이 타츠미와 마주 보고 있는 그는 정신없이 타츠미의 말을 머릿속에 욱여넣으며 간신히 그의 말뜻을 해석했다. 이는 그가 서로 다른 두 개의 언어를 섞어서 사용해서가 아니었다. 애초에 어려운 단어 하나 없었으니 듣고 해석하는 것은 별로 어려울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말을 몰라서도 단어를 몰라서도 아니라면 무엇이 그를 애먹게 했을까. 발음? 중간중간 발음이 부자연스럽기는 했지만... 타츠미가 외국인임을 고려한다면 그리 이상한 발음도 아니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단 말인가.
히이이익, 제, 제제게요? 제게 그런 말씀을 하셨던 거라고요. 그럴 리가요 아아... 저따위가 감히 그런 말을 들어도 괜찮은 건가요오... 그런 단어는 추악한 제겐 어울리지 않는, ...그보다도 계속 사람을 앞에 세워 두고 있었어요 아아, 어떻게, 어떻게 답해드려야 하죠...
제 앞에서 부들부들 떠는 이를 보고 타츠미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다시 한번 그의 입에서
말이 나오려 하기 무섭게 그는 다급히 입을 뗐다. 물론, 이에 그는 상대의 말을 끊었단 생각에 머릿속에선 타츠미를 향해 도게자를 하고 있었지만 그의 머릿속과는 달리 입은 착실하게 뇌가 명령하는 바에 따라 움직였다.
"괜, 괜찮아요 무슨 뜻인지도 알으니까요오...“
"...“
호, 혹시 무슨 이상한 말을 했나요 아아,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아요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한 건지...!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아... 역시 저 같은 건, 우으... 만일 그것이 아니라면 못 알아들으신 걸까요 분명 그리 말씀하셨, ...그냥 마음 편히 공용어로 말할 것 그랬나요오...
자신의 말에 가만히 서 있는 타츠미를 바라본 그는 자신이 말실수를 하였는지 그것이 아니라면 그저 공용어를 사용할 것을 후회하며 자책하며 타츠미를 향해 13 번째 도게자를 할 즈음
타츠미가 사람 좋은 낯으로 그를 보며 환히 웃었다. 환히 웃는 타츠미의 얼굴에는 푸른 바다를 붉게 물든 커다란 태양의 빛무리가 담겨 있었다.
"동향에서 오신 분이셨군요 조금 전에는 실례했습니다. 아아, 그러고 보니 아직 제 소개도 하지 않았군요 저는 카제햐야 타츠미(風早 巽)입니다.“
그런 타츠미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잘생겼다는 생각을 하며 타츠미의 말을 멍하니 듣고 있던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그의 입에서 나온 이름 석 자를 머릿속에서 두 번이나 되새긴
이후였다. 카제하야 타츠미, 카제하야 타츠미... 엣, 여기서 갑자기 자기 소개를요오...? 무리, 절대 무리에요...!
그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어 더는 말이 제 입 밖으로 나오지 않도록 막았으나 언제부터 입술에 자유의지라도 생겼는지 그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렇지만 이는 입술의 자유의지 따위가 아니었다. 입술은 그저 뇌에서 나오는 것보다 더 강하고 본능적인 마음속 외침에 따라-그의 의지에 따라-움직였을 뿐이었으니.
"저는..."
그때, 바다를 삼킨 바람이 둘을 향해 불어왔다. 순간 휘몰아치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감겨버린 타츠미의 눈꺼풀이 다급히 들어 올려졌다. 선명한 빛을 띄는 타츠미의 자안에는 제 앞에 있는이와 똑 닮은 하늘이 비쳤다. 바람에 흩날리는 그의 머리카락은 마치 하늘 위에 밤하늘을 수놓은 하얀 베일이 너울대는 것만 같았다.
바람을 막아보기 위해 들어 올린 그의 팔이 천천히 내려왔다. 기다란 속눈썹이 들어 올려졌을 때 다시 한번 타츠미의 자안과 그의 녹안이 얽혔다. 그의 눈동자에 내려앉은 별빛이 더할 나위 없이 반짝였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바다의 윤슬처럼, 별빛을 받아 반짝이는 바람의 숨결처럼.
멀리서 바람에 춤추는 나뭇잎의 춤사위가 들려왔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우는 풀벌레 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뭍에 닿아 모래와 함께 흩어지는 바다의 연주가 들려왔다. 바람을 타고 온 그의 목소리가 형체가 되어 타츠미의 귓가에 닿았다.
"...마요이, 아야세 마요이(礼瀬 マヨイ)에요."
아야세, 아야세 마요이. 타츠미는 마요이의 이름을 되새겼다. 과연 아름다운 무대 위에 서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이에 이보다 더 어울리는 이름이 있을까. 마요이의 이름을 잊지 않겠다는 듯 머릿속 깊은 곳에 마요이의 이름을 새겼다.
그를 아니, 마요이를 바라보는 타츠미의 얼굴이 어떠하였더라. 타츠미는 대체 어떤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그것이 아니라면 타츠미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을까. 둘 다 아니라면 좀 전과 같이 붉은 노을을 달고 있었을까.
그런 그를 비추는 렌즈와 그를 담는 필름이 따로 있다면 모를까. 애석하게도 그의 렌즈와 필름은 자기 자신을 비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에 타츠미로서는 알 방도가 없었다. 그때의 타츠미로서는 그저 짐작만 할 뿐. 그날 타츠미의 얼굴이 어떠하였는지 타츠미 자신으로서는 모른다. 모를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무대 위의 주인공을 만난 관객은 어떻게 되었지. 어떻게 되었을까. 새로운 만남을 갖은 주인공은? 만일 정말 그곳이 메인 스토리가 펼쳐지는 주 무대라면 그 뒤 주인공은 어떻게 되었지. 어떻게 되었을까.
문밖에서 타츠미를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를 찾는 소리에 그날의 일을 천천히 떠올려보던 타츠미의 눈동자가 뚝 하고 멈춰 섰다. 눈동자와 함께 기억을 더듬던 타츠미의 손길도 멈춰 섰다.
"타츠미 씨-.“
한 번 더 타츠미의 상념을 깨우는 목소리가 타츠미의 귓가에 닿았다. 커다란 기억의 호수에서 나온 타츠미의 눈동자가 따스하게 휘었다. 두 손 위에 올려놓은 앨범을 책상 위에 내려 놓은 타츠미의 손이 앨범의 표지를 부드럽게 쓸었다.
"네, 마요이 씨."
마요이의 말에 대답하며 일어난 타츠미는 문손잡이를 돌려 방 밖으로 나섰다. 문을 열자
들어오는 환한 빛이 그의 약지에 모여 반짝였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바다의 윤슬처럼, 별빛을 받아 반짝이는 바람의 숨결처럼.
문을 열고 나가는 타츠미의 얼굴이 어떠하였더라. 갑자기 들어온 빛 때문에 볼 수 없었다. 문을 여는 타츠미의 얼굴이 어떠한지는 타츠미 자신으로서는 여전히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오로지 그만을 비추는 렌즈와 필름이 있기에 타츠미는 그의 렌즈와 필름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알 수 있었다.
그래, 바람에 살랑이는 나무를 바라보던 해님처럼 그의 얼굴에는 사랑이 깃들어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