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운하 님 (@una_powri) - [ 나의 헤맴을 죽였다 ]
신의 축복 아래 카제하야가가 존재하리! 신의 보배 위에서 자란 모든 자들이 입을 모아 외치는 말이었다. 카제하야가는 정말로 신의 축복을 받은 가문이었다. 정확히는 카제하야가의 독자, 카제하야 타츠미만이 축복을 받았다. 그 안배가 카제하야 타츠미의 샛보라색 눈동자였다.
카제하야가는 대대로 물색 머리칼에 심해를 닮은 짙은 눈동자를 띄는데, 카제하야가 막 태어났을 때도 마찬가지의 외형을 지녔다고 한다. 하지만 신이 밤하늘로 꿰맨 로브를 두르고 내려오던 그 날, 신은 그를 자신의 반려라 칭하며 그 어린 것의 눈동자에 별의 대장장이가 주조한 별을 눈에 박았다고 한다.
이 소문이 가짜라고 하기에는 새까만 어둠의 끝자락에서 오색빛깔이 마을을 뒤덮던 그날이 존재하고, 진짜라고 하기에는 명확한 증거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나라의 진정한 주인이 어디인가, 신을 모시는 신전의 대신관이 직접 나서서 긍정하지 않았는가? 사람들은 그들의 말에 홀린 듯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왕실 집안도, 신관 집안도 아닌, 그저 부유하기만 했던 카제하야 공작가는 이 나라의 세번째 기둥이 되었다. 그리고 그 기둥의 중심에는
“타츠미, 왜 울고 있나요?”
“어머니.”
타츠미가 어머니를 향해 손을 폈다. 오밀조밀한 손 안에는 알록달록한 꽃들이 고이 올려져 있었다. 타츠미의 보석 같은 눈에서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이번에 새로 온 메이드가 거리에서 꽃을 사 저에게 선물했습니다. 하지만 이 꽃들에게는 뿌리가 없고, 또 뿌리를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제 손 안에서 서서히 잠들고 있습니다.”
“저런.”
“인정을 위해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꺾였을 꽃을 생각하니 너무 슬픕니다.”
햇빛의 파편이 아직 어린 아이를 위로하듯 타츠미 위로 바스러졌다. 어머니는 타츠미의 눈물을 조심스레 훔쳐내었다. 그녀의 단호하고 힘있는 목소리가 타츠미의 귀를 울렸다.
“타츠미, 만물은 눈 앞에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닙니다. 타츠미의 손 안에 있는 것만이 생명이 아닙니다. 그러니 당신의 눈 앞에서만 일어난 일에 일희일비하는 것은 과연 이기적인 일이지요.”
타츠미의 머리 위로 양산이 드리워졌다. 어머니가 그늘 아래에서 싱긋 웃었다.
“신의 반려가 사람의 몸으로 태어난 이상, 당신은 생사에 초연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세상 모든 만물의 생사를 신에게 전달하는 반려가 반드시 지녀야할 자세이지요. 알겠나요, 타츠미?”
“네, 어머니.”
“아직 차를 마시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그 꽃들은 자연 속에서 떠나는 것이 더 좋겠죠. 마당의 볕 좋은 곳에 놔두고 어서 안으로 들지요.”
“네, 알겠습니다!”
카제하야의 얼굴에 빛이 가득 찼다. 어머니는 타츠미의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아아, 이 아이가 정말로 신의 축복을 받은 자였다면 좋을텐데.
타츠미의 앞에 자신의 눈과 똑같은 색깔의 액체가 잔에 가득 들어찼다. 과연 그 액체는 햇빛이 스며들면서 빛을 내고 맑은 소리로 울었다.
타츠미가 아무 의심도 안하고 마신 그것은, 인간의 피를 섞었다.
“타츠미의 눈 색깔이 많이 옅어졌다. 피를 더 넣도록 해.”
“하지만 여기서 더 넣으면 혈주(血主)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흠. 그럼 복용횟수를 더 늘리도록.”
“네 알겠습니다.”
타츠미의 어머니인 한 귀부인이 차갑고 단단한 철문 앞에서 수하에게 명령하고 자리를 떴다. 그리고 거대한 문 안에, 왜소한 아이가 작은 소리로 훌쩍이고 있다. 가는 팔다리는 피가 스며든 붕대 때문에 살을 찾아볼 수 없었고, 둘둘 감긴 목덜미 안에는 주사바늘이 가득했다. 이 집의 아들과 똑같은 색인 보라 머리는 허리께를 넘었고, 창살 아래로 새어 들어오는 빛이 잔뜩 붉어진 눈가를 비췄다.
이 집의 독자가 마신 피의 티는 과연 살아있는 인간의 피였다. 밤하늘에 별을 수놓은 보라색 머리칼, 한낮의 물빛을 담은 눈동자. 이 아이가 바로 신의 축복을 받은 진짜 신의 반려이다. 귀부인은 몇 년 전의 그 수치스러운 일을 상기시키며 철문을 째려보았다.
오색빛깔이 밤하늘을 가득 비추던 그 날에 신의 대리자가 카제하야가에 온 건 사실이다. 하지만 신의 대리자가 ‘신의 반려’라 칭한 건 다름아닌 새까만 머리를 가진 핏덩이였다. 그것도 자신의 아이라며 어거지로 들어온 평민 남자의 자식. 이 사실을 두 눈 앞에서 목도한 카제하야 부부는 거품을 물고 쓰러질 지경이었다. 안 그래도 가증스러운 두 먼지들이 이 집에 들어온 것도 화가 날 지경인데 하물며 이 먼지들이 우리 가문 안에서, 우리 가문을 제치고 감히 신의 축복을 받다니! 이 사실이 탄로나는 순간 카제하야가의 만행이 소문을 타고 번질 것이고, 상인 집안인 카제하야가의 명성은 순식간에 실추당할 게 뻔했다. 그래서 신의 대리자가 왔다 간 그 날 밤, 두 부부는 결심했다. 사실을 바꾸자. 그 핏덩이를 지하 깊은 곳에 숨기고, 핏덩이의 힘을 갈취해 우리 아이에게 주자. 아이에게 안배가 드러난다면 곧바로 신전에 가서 이 사실을 공표하자. 그것이 손을 쓰지 못하도록, 죽이자.
두 부부는 단 몇 시간만에 이 거대한 사실을 감추는 데 성공했다. 핏덩이를 품에 안고 잠든 온화한 청년은 독초로 사망했고, 신의 안배를 받아 죽지 않은 핏덩이는 백년 간 쓰지 않던 지하감옥 안에 집어넣었다. 부부는 그 어린 것의 보라색 머리카락, 체액, 피, 살점을 떼어 가장 효과가 좋은 방법을 찾았다. 그 결과가 카제하야가 어릴 때부터 먹던 피를 섞은 티였다. 부부는 생각했다. 이름도 안 붙인 이것이 밖으로 나오지 않는 이상 다들 아무것도 모를 것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제 어린 아들의 호기심을 간과했다.
깜깜한 지하공간 제일 높은 곳에 뚫린 아주 작은 창살, 그 사이로 어리지만 점잖은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여긴 처음 보는 공간이네?”
“….?”
“아, 사람이 있군요!”
안녕하세요! 한 아이가 지하의 마물에게 인사했다. 신에게 사랑받았지만 운명에게 버림받은 어린 마물은 당혹스러웠다. 신에게 외면 받았지만 운명에게 사랑받은 신의 파편이 활짝 웃었다.
“전 카제하야 타츠미라고 해요. 당신은 누구인가요?”
“……..”
“어라, 제 말이 들리지 않는 건가요?”
어린 타츠미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보라빛 머리칼이 좌우로 거세게 흔들렸다. 보라색 머리칼이 머뭇머뭇 손가락을 꼼질 거리더니 결국 의미 없이 손을 모았다. 타츠미는 깜짝 놀라더니 미안한 얼굴로 사과했다.
“혹시 이름이 없는건가요? 정말 미안해요. 괜찮다면 제가 이름을 지어 드려도 괜찮을까요?”
“…..!”
마물은 고개를 바로 저으려 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태어나서 한번도 이름이란 걸 가져 보지 못한 탓이었다. 내가 이름을 가져도 되는 걸까…. 어린 공자는 그의 마음을 곧바로 눈치채고 말을 곧장 쏟아 내었다.
“이름이 있다는 건 정말 멋지답니다! 어떤 사람이더라도 내 이름 하나만으로 그 사람과 친해질 수 있으니까요.”
귀공자가 말갛게 웃었다. 보랏빛 마물은 그 웃음을 보고 본능적으로 발을 내뺐다. 마요이는 처음으로 살아있는 태양을 보았다. 그때, 멀리서 공작이 화난 눈으로 타츠미에게 다가왔다. 공작이 타츠미의 팔을 거칠게 잡더니 크게 화냈다. 공작은 타츠미를 거의 끌다시피 데리고 가려 했다. 마물은 창살 너머로 살기를 느끼고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타츠미가 그것을 보고 급하게 제 목장식을 풀어 창살 아래로 떨어뜨렸다. 다음에 꼭 이름을 지어 줄게요, 맹세할게요! 그렇게 두 사람이 사라지고 조용한 가운데, 보라빛 머리가 천천히 걸어 나와 그것을 두 손으로 조심히 받혔다.
이것이 카제하야 타츠미와 아야세 마요이의 첫만남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카제하야가의 독남은 고사리 손이 잘 다듬은 나뭇가지처럼 곧고 아름답게 뻗고, 키가 제 어미를 넘었다. 레이메이 제국학원 입학식의 주인공, 카제하야 타츠미는 만인의 관심과 호감을 받고 있다.
“저 분이 카제하야 가의….”
“듣던대로 정말 영롱한 보라빛이군요. 정말 아름다워요.”
“4대 공작가 중 우위를 공작가의 아들 답군요. 만인을 휘어잡는 인상입니다.”
“나 이 학원에서 빨리 특대생으로 진급해서 공자님과 이야기하고 싶어!”
“검술실력도 최고라는데 우리 같은 하급생은 겨뤄보지도 못하겠네.”
레이메이 학원은 황가의 자제를 제외하고 제아무리 나이가 많거나 뛰어난 신분과 능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하급생으로 취급하는데, 해마다 한 번씩 실시하는 특대생 선발전에서 특대생이 뽑힌다. 하지만 특대생을 뽑는 기준은 가히 이 공화국 신분제도의 액기스만 뽑아 축소한 격이었다. 선발전에서 가문과 개인의 역량을 시험 받고 뽑힌 최고의 하급생은 마지막으로 현 특대생의 진급허가를 받고 나서야 특대생으로 진급한다. 그래서 레이메이 학원은 피로 물든 황금알이라고도 한다. 사람이나 짐승이냐가 결정되는 피 튀기는 이분법을 거쳐 운 좋게 특대생으로 졸업한다면 앞으로의 미래에 황금빛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4대 공작가의 실세 카제하야가의 아들 또한 마찬가지로 하급생이지만 이번 특대생 선발전은 따놓은 당상이었다. 보라, 저 위에 군림해 있는 현 특대생들의 얼굴을. 다들 하나같이 타츠미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얼굴이 아닌가. 입학식의 주인공들은 모두 자신의 입학을 축하하긴 커녕 카제하야 타츠미의 고결한 모습을 보며 감탄을 금치 않았다. 신에게 사랑받는 자. 이 수식어는 과연 특대생들도 자연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신을 섬기는 나라에서 당연한 반응이었다. 특대생 중 한 명인 사에구사 이바라 또한 이번만큼은 신을 섬기는 입장으로써 타츠미에게 무언가를 할 수작조차 부리지 못했다.
그렇게 만인이 우러러보는 와중, 단 한사람은 그 모습을 따뜻한 눈으로 몰래 보고 있었다. 그것도 먼지가 가득한 천장 위에서.
“…저 같은게 계속 보다간 타츠미님이 더러워지시니까 그만 봐야겠어요오…”
마요이가 살금살금 천장을 닫았다. 철창살 아래에서 숨쉬던 마물은 어느새 훌쩍 자라 천장 위에서 레이메이 교복을 입은 채 숨을 쉬었다. 마요이는 두 다리를 모아 조용히 그날을 회상했다.
그날은 죽기 직전까지 피가 빨렸다. 어린 타츠미가 이곳에 오는 일은 없었고, 10년동안 축축한 감옥에서 그 소년만을 기다리던 마물은 제 사육사가 말하는 것을 띄엄띄엄 들었다.
‘너 같은 괴물은 마땅히 죽어야 하지만 내가 자비를 베풀었기 때문에 여태까지 살아있는 거란다.’
‘우리 아들은 몸이 아파서 괴물의 피라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어. 네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우리 아들에게 피를 주는 것밖에 없으니 이 일이라도 잘 수행하도록 해.’
‘타츠미가 곧 레이메이 학원에 입학한다. 기숙사에서 생활하니 피를 공급받지 못하니 네가 가까이에서 보필하면서 그이 몰래 티에 피를 섞도록 해.’
‘입학하려면 이름이 필요하겠지…쯧, 귀찮으니 대충 ‘마요이’(헤메다)로 할까.’
그렇게 고급원단의 남자가 나가고, 마요이는 쓰러진 몸으로 숨을 색색 쉬며 속으로 이름을 상기했다. …타츠미. 카제하야, 타츠미….
마요이의 머리속에 그 말간 얼굴이 생각났다. 그 눈부신 해님은 이 집의 아들이었구나. 마요이는 자신에게 이름이 생겨난 것 보다 해님을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는 생각에 크게 기뻐했다. 나 같은 게 해님, 아니 타츠미님께 도움이 되다니. 마요이는 철문을 나오고 나서부터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타츠미가 특대생이 된 지금까지도 마찬가지였다.
해님은 만인에게 상냥했다. 하급생이 자신의 것을 대신하는 것을 극구 거절했고 하급생이 자신을 보좌하는 것에 못마땅하여 그들을 물렸다. 특대생이 된 그는 여전히 하급생 좌석에서 수업을 들었고, 하급생이 사용하는 보호구와 목검을 사용했다. 사에구사가 웃는 낯짝으로 그에게
“카제하야 공자님께서 하등한 것에게 이리 아량을 베풀어 주시는 모습! 전 오늘도 큰 깨달음을 얻고 갑니다. 허나 특대생을 위해 마련된 것을 쓰지 않는 것은 이 제도를 마련하기 위해 힘 써주신 선조들에게 실례되는 것이 아닐까 십습니다만-“
라고 이야기 해보아도,
“하하, 그 또한 맞는 말이군요. 맞습니다. 이 제도 또한 만인의 노력이 일구어 낸 것이지요. 하지만 인간은 모두 평등합니다. 그 누구도 하대 받을 이유는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신의 손길이 들어간 것이라고 해도 누군가가 고통받는다면 그것은 필시 모순이 있는 것이죠.”
라는 식으로 맞받아쳤다.
아야세 마요이는 자신이 인간이 아닌 것이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자신의 이런 더럽고 불완전한 존재 따위 나의 신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의 신이 보지 않는 곳에서 마요이는 거리낌 없이 제 팔을 그어 짙은 피를 티팟에 떨어뜨릴 수 있다. 옛날부터 마요이의 피를 담았던 티팟의 내부는 채 지워지지 않은 핏자국이 가득했다. 마요이는 그것을 보고 조용히 생각했다. 티가 식더라도 타츠미님께 티팟을 보여주지 말자고. 제 피도, 자신도, 이 티팟 속에서 조용히 죽어가자고. 나의 신을 위해 죽는다면 그것보다 더한 존재의의는 없으리라. 애초에 자신의 존재이유는 그것뿐이었으니.
하지만 살아있는 신에게 깊은 신앙심을 품은 마물이 신의 눈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안녕하세요.”
“흐, 흐이이이익-!”
마요이가 개인실 문 앞에 티와 달달한 사탕이나 초콜릿 따위를 담은 바구니를 놓고 있을 때였다. 항상 멀리서만 듣던 목소리가 마요이의 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마요이가 온 몸을 다해 놀라며 목소리의 주인과 후다닥 멀어졌다.
“시, 신님…아, 아니 그게 아니라 그…”
“타츠미에요. 카제하야 타츠미.”
“타츠, 카제하야…님…”
“제 방 천장에 항상 누군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당신이었군요.”
“죄, 죄송해요! 상쾌한 아침을 항상 망쳐 놓은 거 같아서 죄송해요! 저 따위가 감히 카제하야님을 위하겠다고 나대서 죄송합니다아…!”
마요이가 고개를 몇번이나 숙이며 횡설수설 사과를 하더니 조용하고 신속하게 멀어졌다. 타츠미가 급하게 그를 불렀다. 그리고 마요이는 그 타츠미님에게서 나온 말에 굉장히 당황했다.
“잠시만요 아야세!”
타, 타츠미님의 용안에서 삿된 이름이 나왔어요! 아아, 전 죽을 거에요. 신에게 이름이 거론되었으니 저 같은 마물은 죽을 거에요오! 마요이가 다시 도망치려 발을 디뎠지만 어느새 타츠미가 다가와 어깨를 붙잡은 탓에 석상마냥 굳을 수밖에 없었다. 온화하고 거룩한 미소가 정면으로 들어왔다.
“이렇게 만난 것도 신이 맺어준 인연입니다. 기왕 만난 김에 함께 차라도 마실까요?”
“히, 히이이익….!”
마물이 인간의 탈을 쓰고 만난 자는 과연 신이었다. 해님 아래에서 제대로 숨도 못 쉬고 첫 다과회를 마치고, 마물은 더 이상 그와 마주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더 치밀하고 더 음습하게 움직였지만 나의 햇님은 숨쉬듯 그를 찾아 제 앞으로 끌고 올라왔다. 언제는 도망이라도 쳐보겠다며 학교 안에서 술래잡기를 벌인 적도 있었다. 이 일은 전 국민이 카제하야가의 소문 따위를 짓씹을 때 함께 회자되는 소문이 되어 버렸다는 건 곧 밝혀질 일이었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마요이는 몇 번이나 도망치려 했고, 타츠미는 그가 도망치기도 전에 그의 덜미를 붙잡아 학교생활을 함께했다. 타츠미가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건 마요이가 더 이상 그에게서 도망치는 걸 포기할 때 즈음이었다.
“항상 궁금했는데 원래 머리를 그렇게 묶고 다니나요?”
호수 위에서 보내는 휴식시간이었다. 벤치 끄트머리에 떨어져 버릴 기세로 앉아있던 마요이가 타츠미의 말을 듣고 끈으로 대충 묶은 제 머리를 생각해냈다. 바닥에 질질 끌리던 머리는 철문을 나서면서 갈비뼈 부근까지 잘랐다. 하지만 그 머리도 이곳에 와서 손을 대지 않다 보니 다시 길어져 허리를 아슬아슬 넘겼다. 마요이는 그 긴 머리를 그날 해님이 하사하신 낡은 비단끈으로 대충 동여맨 상태였다.
“아, 네에…그, 머리를 기르는 걸… 좋아해서요..”
거짓말이다. 마요이는 머리를 기르는 것 따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제 주인이 머리를 절대 자르지 말라는 명이 있었기 때문에 가만히 놔두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마요이가 제 옆에 앉아있는 타츠미를 흘긋 보았다. 나의 해님이 슬퍼하는 얼굴은 보고 싶지 않아요.
타츠미가 검은 비단끈 아래로 고이 모아져 있는 머리를 뚫어져라 보더니 조용히 말했다. 제가 묶어드려도 될까요? 마요이는 타츠미의 말에 맘껏 당황할 수도 없었다. 그가 돌연 검은 비단을 풀어 버렸기 때문이다.
마요이가 햇빛을 싫어하는 탓에 사방에 검은 베일을 내려서 이 좁은 공간을 빛내는 건 주황빛 등불 하나뿐이었다. 베일 사이사이로 햇빛이 부스러졌다. 신의 축복을 받은 비단결 머리칼이 타츠미의 손 안에서 배회했다. 마요이는 그의 손길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타츠미의 곧은 손가락이 마요이의 귓볼을 스쳤다. 마요이가 몸을 흠칫 떨었다. 타츠미는 그런 마요이의 뒷모습을 짙은 보랏빛 눈으로 지그시 보았다.
“아야세씨의 머리 색, 제 눈동자와 똑같은 색깔이네요.”
“……..”
“전 제 눈동자가 아름답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 아야세씨의 머리칼을 보니 남들이 제 눈동자를 아름답다고 하는 이유를 알겠어요.”
아야세씨의 머리칼, 너무 아름다워요. 타츠미가 곱게 땋은 머리를 문질이었다. 마치 해가 뜨기 전, 여명의 밤하늘을 보는 것 같아요. 제 뒤에서 낮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가 나에게 얼마나 크게 와 닿는지 그는 알까. 마요이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낡은 비단끈이 제 머리칼 사이를 이리저리 스치었다. 언제, 언제 끝나는 거지… 정화되어 사라지기 싫어요… 타츠미님을 더럽히고 싶지 않아요…
“다 됐어요.”
“흐이이익-!”
달팽이관을 깊이 울리는 온화한 목소리는 마요이가 소스라치게 놀라기에 충분했고, 배를 뒤집기에도 충분했다. 햇빛과 주황 등불이 베일을 이리저리 들쑤시고, 시야는 순식간에 물빛으로 가득 찼다.
“푸하-!”
그리고 나의 신이 물 속으로 사라지려는 나를 붙잡아 올리는 모습을, 마요이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두 인간이 숨을 몰아 내쉬며 숨을 골랐다. 타츠미는 단단한 팔로 마요이를 억세게 쥐어 안았고, 그가 떨어지지 않게 가슴팍으로 꾹 밀었다. 타츠미가 남은 한 손으로 가지런했던 물빛 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윽고 환한 웃음.
“아하하! 아야세씨에게 당해버렸네요.”
“죄, 죄송…!”
“사과하지 마요, 아야세. 이런 위험한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다면 그건 필시 당신이 있어서 인걸요.”
타츠미가 처음으로 신을 거론하지 않았다. 마요이의 두 눈이 살짝 커졌다. 타츠미가 마요이의 보랏빛 머리를 조심히 쓸었다. 신의 파편을 넣은 인간이 인간의 탈을 쓴 마물의 이마에 입술을 붙였다. 마요이는 그 순간,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너무 황송해서, 너무 거룩해서, 나 같은 게, 감히. 하지만 이런 생각 따위 내뱉을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마물 또한 그 인간을 사랑해 버린 지 너무 오래 되었기에. 철창살을 사이에 두고 이 소년을 만났을 때부터 난 당신 만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마요이가 그의 젖은 가슴팍에 얼굴을 깊이 묻었다. 타츠미가 그의 차가운 등을 너르게 쓸었다. 마요이는 조용히 회환을 삼켰다.
이날 이후, 마요이와 타츠미는 서로 이름을 놨다. 카제하야나 아야세 따위로 부르는 것을 그만두고 타츠미나 마요이로 불렀다. 하급 좌석에서 함께 수업을 듣고, 함께 대련을 했으며, 함께 학교를 거닐었다. 그리고,
“마요이, 당신을 진심으로 아껴요.”
“사랑해요, 마요이.”
“아아, 타츠미…나의 신…”
함께 밤을 보내기도 했다. 마요이는 자신이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건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서로가 사랑을 속삭일수록 서로의 밤하늘도 점점 짙었다. 마요이의 머리칼이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고, 타츠미의 눈동자는 달빛 아래에서 더 반짝였다.
그와 함께 한다고 해서 티를 내리는 걸 그만두지는 않았다. 관계를 맺기 시작할 때 부터는 나의 신이 너무 걱정해서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렸다. 하지만 세상은 좁고 인간은 많다고, 인간의 탈을 쓴 마물이 누군가에게 정체를 들킨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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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학생이 신에게 사랑받는 카제하야가의 독남을 저주하기 위해 제 피를 티에 섞어 건넸다! 소문이라 하기에는 증인과 증거가 있었고, 가짜라 하기에는 범인이 범행을 순순히 인정했다. 인간인 줄 알았던 자의 정체가 신성한 철퇴 아래에서 정체를 드러낸 것이다!
“이런이런 카제하야님! 불우한 사고에 진심으로 조의를 표합니다. 숭고하고 신성한 레이메이 학원에서 이런 극악무도한 일이 벌어질 줄은!”
“…….”
“그 자의 방을 조사해보니 칠이 다 벗겨진 티팟에서 핏자국이 있더군요. 공작님께서 이곳에 출두하실 테니 곧 진상이 밝혀지겠지요.”
앉아있는 타츠미의 얼굴은 여전히 펴질 줄 몰랐다. 사에구사는 그의 안색을 흘긋 확인하고 싱긋 웃으며 간사하게 혀를 놀렸다.
“아야세 마요이라고 했던 가요, 그 죄인.”
“……”
“학교에서 당신들의 이야기가 자자했습니다. 그만큼 친하게 지냈고, 그만큼 믿었겠지요. 아아, 학생들을 위해 제가 좀 더 이 학교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어야 하는건데, 제 실책입니다!”
“그만하세요.”
타츠미의 말에 사에구사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질문만큼은 하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도망치실겁니까?”
“…….”
“당신을 저주하려 했던 자와 함께?”
“마요이는 날 저주하려고 한 게…!”
“아니라고요? 꽤나 확신하십니다?”
타츠미가 무어라 입을 떼려다 이내 다물었다. 실상 타츠미도 마요이가 정말로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었다. 그 티는 내가 몸이 약한 탓에 어릴 때부터 영양제처럼 먹어오던 티였다. 색깔과 향기마저도 이번의 그 ‘저주받은 티’와 똑같았다. 근데 피라니, 그것도 마요이의 피라니!
“쯧, 앞으로 그 삿된 것과는 멀리 하거라.”
“잠시만요 아버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저에게도 설명해주십시오!”
“그것이 제 입으로 널 저주하려고 피를 먹인 거라 시인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야. 너도 그리 알도록 해.”
공작은 제 아들의 간절한 청을 무시하고 마차를 타고 학원을 떠났다. 타츠미는 마차의 뒤꽁무니를 창백한 안색으로 바라 보았다. 정말로, 마요이가.
‘타츠미씨, 세상 누가 뭐라고 해도, 전 진심으로 당신만을 신봉합니다.’
‘아아, 왜 이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가 사랑밖에 없을까요? 너무 아쉬워요….’
그 모든 말과 얼굴이 거짓이었다고?
‘타츠미씨’
정말로?
‘사랑해요…’
….그 말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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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건 이후, 마요이는 레이메이에서 퇴출당하고, 제 부모에게 끌려가듯 이곳을 떠났다. 마요이와 연락을 하려 해도 그는 그 이의 집도 모르고, 하물며 가족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평민’인 마요이는 공작가문의 카제하야 타츠미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타츠미는 마요이가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했다. 타츠미는 괴롭게 앓았다. 어쩌면 마요이는 이미 자신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 생각에 타츠미는 식음을 전폐했다. 항상 먹던 맛나는 티가 제 앞에 놓일 때 마다 헛구역질을 했고, 그 누구도 함께하지 않았다. 타인의 오만 가득한 걱정과 염려에 웃음으로 화답할 뿐 그 이상의 소통은 거절했다. 마요이의 소식이라도 들으려고 사방에서 떠도는 소문에 귀를 기울이면 누가 그것을 막기라도 하는 듯 타츠미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았고, 그에 몸이 상하고, 정신이 상하고, 또 주기적으로 공급받던 신성이 끊기면서 아름다운 눈의 색깔 또한 상했다.
마요이의 소식이 들린 건, 마요이의 사형일이 확정나는 날이었다. 밤하늘을 삼킨 칠흑 같은 눈동자가 소리 없이 절규했다. 그리고 별빛마저 삼킨 새까만 구름이 하늘을 침범한 날, 타츠미는 레이메이에서 뛰쳐나왔다. 그의 행선지는 당연, 마요이가 갇혀 있는 교회 감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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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만요 카제하야 공자님, 그것에게 가겠다니요! 그것이 당신의 신성에 얼마나 해로운지 아십니까!”
“그 자가 당신을 저주하는 바람에 신의 안배가 이리 약해졌습니다. 공자님의 새까만 눈동자를 보십시오!”
“신이 삿된 자에게 철퇴를 놓으려면 신성한 것과 만나면 안된다는 것을 잘 아시면서 왜 그러십니까!”
카제하야는 처음으로 교황의 말을 무시하고 감옥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거기까지 가니 교황은 더 이상 못 말리고 경비병을 불렀다. 주변을 경계해라.
“마요이, 마요이!”
“….타츠미씨?”
조용히 숨쉬고 있던 마요이가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될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타츠미가 창살을 잡고 주륵 내려갔다. 마요이가 엉금엉금 기어와 그의 용안을 살폈다. 타츠미는 옷이 구겨진 것 말고는 멀쩡했으나 마요이는….
“.…이게 다 뭡니까….”
“타츠미씨…”
“고문을 당한 겁니까? 상처들이 다 곪았어요….”
타츠미가 창살 너머로 손을 뻗어 그의 손가락 끄트머리에 살짝 올렸다. 그의 말 대로 마요이의 가슴팍에 길고 깊은 상처가 살을 파고 들어간 데다 제대로 된 처지도 없어 진물이 다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가 도망가지 못하게 다리의 힘줄까지 잘라 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마요이는 그저 웃음만 나왔다. 나의 신이 생기 가득한 얼굴을 찡그리니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저 같은 게 감히 당신의 용안을 보면 안 되는데 말이죠. 마요이가 두 눈꼬리를 잔뜩 휘었다.
“나의 신, 카제하야 타츠미… 당신이 지금 내 앞에 있다니…정말 꿈만 같아요.”
“아아, 마요이…아야세 마요이….”
“자신을 저주한 상대를 보러 오다니… 역시 신에게 사랑받는 해님은 너무 친절하세요…”
두 눈꼬리에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이렇게 와버리면…. 당신을 위해 기껏 죽으려 다짐한 게 전부 물거품이 되어버리잖아요…. 사실은 저주하려고 그런 게 아니라고…. 진심을 말하고 싶잖아요…”
두 어깨가 들썩였다. 온 몸에 난 상처가 울컥 피를 토했다.
“신님은 마물에게 어찌 이리 착하게 구세요….”
“…..마물이 아니에요.”
그와 함께 울음이 뒤섞인 망가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묵직한 자물쇠가 덜컥 열렸다. 방금 간수에게서 몰래 뺏어 온 감옥 열쇠였다. 그는 챙겨온 칼로 마요이의 손발에 채워진 사슬을 단번에 끊고 그를 두 손으로 안아 들었다. 그가 고개를 숙여 마요이를 보았다. 그 또한 유리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전 신 같은 게 아니에요. 우리 둘 다…그저 사람이에요…”
“……..”
“그저 바보 같은 사람 둘밖에 없어요, 마요이.”
그렇게 둘은 교회를 탈출했다. 교회를 제 집처럼 다니던 공자가 마음먹고 사라지는 건 식은 죽 먹기였고, 그런 공자를 찾는 건 하늘의 별 따기와 다를 바 없었다. 시끄러운 도시 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산길의 중턱까지 올라왔다. 하늘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마요이의 피냄새와 제 눈이 공명했다. 마요이의 숨이 카제하야의 품에서 점점 얕아졌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당도한 곳은.
“와아, 아름답네요오…”
“…..그러게요.”
어느 한 절벽이었다. 카제하야는 겉옷을 훌렁 벗어 바닥에 깔아 그 위에 마요이를 앉히고 그 옆에 자신이 앉았다. 제 어깨에 기댄 마요이가 조용히 숨쉬었다. 성치 않은 몸 가운데 그의 머리칼은 여전히 그가 땋아준 머리 그대로였다.
“사실 이 머리끈, 옛날에 주운 거에요. 어느 한 귀공자께서 제가 있는 천한 공간에 모르고 떨어뜨리셨거든요.”
“그분은 어떤 분이셨어요?”
“활기차시고, 밝으시고, 잘 웃으셨어요. 물빛 머리에 보라색 눈을 가진 분이셨는데, 그 분은 태양 아래에서나 달 아래에서나 언제나 빛나실 것 같았어요.”
“…….”
“근데 지금 보니까 역시 나의 신은 태양 아래에서 제일 빛나는 것 같아요.”
마요이가 헤헤 웃었다. 마요이를 알게 된 후로 처음 듣는, 바보 같은 웃음이었다. 타츠미의 마음 언저리가 욱신거렸다. 마요이와 타츠미의 손가락이 서로 얽혀 들어갔다.
“타츠미씨, 옛날에 발견하셨던 철창살 밑의 거대한 동공을 기억하시나요?”
“글쎄요… 워낙 오래된 일이라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전 그 동공 안에서 자랐어요. 주인님 말로는 전 원래 태어나서는 안 돼는 사람이래요. 근데 두 분께서 은혜를 베풀어서 지금까지 살아있던 거라고….”
타츠미의 대답을 따뜻하게 넘기고 마요이가 계속 말을 이었다. 타츠미도 조용히 그의 말을 들었다.
“타츠미님은 선천적으로 병을 가지고 계신 대요. 어떤 병인지는 모르겠지만…저 같은 못난 것의 피라도 있어야 해서 제 피를 몰래 먹여 왔지요. 타츠미님이 레이메이 제국학원에 진학하고 난 뒤로는 피를 공급할 방법이 없어서 이름도 신분도 없는 저에게 신분을 만들어 학원에 친히 입학시켜 주셨고요.”
“……”
“타츠미님께서는 이런 제가 너무 경멸스럽죠… 당연해요. 저도 이런 제가 경멸스러운 걸요. 하지만 전 그 동공에서 물빛 소년을 만나고 처음으로 내가 숨쉬는 걸 알았어요. 처음으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걸 알았어요.”
마요이가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타츠미, 지고무상한 나의 신이여… 당신이 살아있다는 것 만으로 누구는 제 삶을 인정받는 답니다… 그리고 인정받는 그 순간마다 사람이 되어서 정말 뛸 듯이 기뻤어요.”
마요이가 물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당신과 함께 하면서…. 제 주제에 감히 바라서는 안 될 것을 바랬어요. 나의 신 타츠미, 내 연인 타츠미… 당신과 지내는 매일매일이 너무 즐거워서…. 감히 내일을 기대했어요…”
마요이의 얄따란 손을 잡은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마요가 어깨를 기댄 상태로 고개를 숙여 울었다.
“당신과 행복한 하루를 보내는 걸 상상했어요… 당신과 여생을 보내다 마지막 여명을 맞는 걸 상상했어요.”
“또 무엇을 상상했어요?”
마요이의 멍한 머리로 고저 없는 따뜻한 어투가 들려왔다. 마요이는 띄엄띄엄 자신이 생각한 타츠미와의 여생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아침에 같은 기숙사에서 일어나 아침을 해먹는 일, 함께 대련을 하고 외부로 나가 시장에 들르는 것, 당신의 데뷔탕트를 멀리서 지켜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면 서로 웃는 것, 길고양이를 데려와 일부터 열까지 고양이에 대해 배우며 키우는 것, 언젠가 공작이 된다면 자신이 그 옆에서 보좌하는 것, 모두가 잠든 시각엔 오늘 하루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며 소박하게 다음날을 맞이하는 것, 기계를 만지는 것을 좋아하는데 언젠가 제일가는 기계공이 되어 카제하야가의 전속 기계공이 되고 싶다는 (마요이의 기준에서) 큰 야망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더 이상 생각나지 않아 마요이가 멍하니 눈을 깜빡일 때 즈음이 되서야 타츠미가 입을 열었다.
“해가 뜨면, 다 해볼까요?”
“…..네?”
“같이 밥 해먹다가 태워도 보고, 대련도 하고, 기숙사를 몰래 빠져나와 야시장도 구경 가고, 데뷔탕트 땐 내 파트너가 되어 춤추고, 길고양이 가족을 집에서 키우고, 마요이는 하고싶은 공부 열심히 해서 제국의 제일가는 기계공이 되고, 저는 당신이 제일가는 기계공이 되기 전에 홀랑 뺏어와 전속 기계공 자리에 앉히고, 정원에서 우리 둘만의 결혼식도 올리고…”
마요이가 고개를 돌려 타츠미를 보았다. 타츠미도 고개를 돌렸다. 마요이가 깔고 앉은 새하얀 겉옷이 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타츠미가 환하게 웃었다. 우리 다 해봐요. 마요이의 눈에 울컥 눈물이 새어 나왔다. 마요이가 또한 처음으로 환하게 웃으며 진심을 다해 대답했다. 네, 다 해봐요, 우리…
타츠미가 마요이의 얼굴 위에 하나하나 입을 맞췄다. 잔뜩 부풀어 오른 피멍, 쥐에게 갉아먹힌 볼의 상처, 턱 아래의 깊은 생채기들. 그리고 입술. 마요이와 타츠미의 머리통이 서로를 지탱했다. 새까만 여명이 음습히 다가오더니 점점 밝아지고, 해가 수평선 아래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요이, 해가 떴어요.”
태양빛이 발 아래의 붉은 옷을 매정하게 비추었다. 타츠미의 목소리는 고저가 없었다.
“너무 아름다워요.”
마요이는 웃음을 띈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타츠미의 두 볼에 투명한 유리구슬이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저 아름다운 태양도, 나의 신을 가리지는 못하네요.”
밤하늘이 태양 위에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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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제하야가의 저주! 이 읍습하고도 무시무시한 저주는 제국 전체로 퍼졌다. 소문이라 함은 보통 평민들 사이에서만 도는 것이 보통인데 어째서인지 이 소문은 자위를 막론하고 무성하게 뻗었다.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요?”
“결국 저주를 받고 미친 신의 아이가 태양신(태양) 아래에서 제 가족과 사용인을 모두 죽였다네요. 특히 자신의 부모를 죽일 때 그 독자가 이리 소리질렀다고 합니다. 당신은 나와 마요이를 죽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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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요이? 마요이가 뭡니까?”
“마요이는 동양의 말이라더군! 뭐라더라 뜻이…헤매다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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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매다’, 입니까… ‘나와 헤맴을 죽였다’? 이상한 말이네요.”
“그 말을 미치광이 귀족, 신의 사랑을 받는 카제하야 타츠미가 직접 말했다지 않습니까! 설마 아직도 살아있는 건 아니겠죠?”
“그런 섬뜩한 소리 마세요. 그 미친 신의 아이는 지하에 숨겨져 있는 독방에서 독약을 먹고 죽었습니다. 제 두 눈으로 확인까지 했다고요.”
“그러고보니 여식의 아버님께서 카제하야가의 조사를 맡았죠? 후계자로써 좋은 공부가 되셨겠습니다.”
“쯧, 그 미치광이 귀족이 말하는 거에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런 기분 좋은 다과회에서 이런 섬뜩한 이야기는 그만두지요. 괜히 흥만 깨는 격 아니겠습니까.”
“하하, 그 말이 맞습니다! 그러고보니 사에구사가는 본격적으로 송곳니를 드러낼 셈인가 봅니다. 황자가 사에구사의 서자를 곁에 두더군요.”
“더군다나 그 사에구사가가 카제하야가의 모든 권리를 위임받았다고 하니 거 참… 이거 아무래도 판도가 뒤집히겠습니다.”
‘카제하야가의 저주’, ‘저주받은 신의 아이’, ‘태양신의 장난’ 등. 이 일화는 시대가 지나고 세기가 지날수록 마치 하나의 명작처럼 이어져 오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각본과 책이 나왔고, 이것을 토대로 속편이 나오기도, 또는 알고 보니 살아있었습니다 따위의 해피엔딩의 스토리도 대거 출판되었다. 하지만 수많은 시대와 몇 세기를 거치고도 딱 한 문장, 그 문장만큼은 감히 고쳐지지 않았다.
‘당신이 나의 헤맴을 죽였다’. 이 문장은 카제하야가의 독남, 카제하야 타츠미의 일생을 나타내는 단어일지도 모른다. 마지막이 해피엔딩이었다면 그건 필시, 풍랑(시련)으로 다시 당신을 만났다 따위의 문장이 세기를 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신은 풍랑이 죽고 난 뒤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가? 나는 알고 있다. 그들이 풍랑에서 숨쉬고, 태양신의 눈을 피해 새까만 공동 아래에서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오늘 하루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나는 안다.






